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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象村 申欽 (1566-1628)


- 序 -

秋修理山 몇년전 우리 고전의 단편 선집을 읽고 상촌선생의 글에 매료되었다. 조선 중기에 자신의 생각과 내면을 이렇게 잘 표현 할 수 있는 선비가 있었던가 싶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은 자신의 글을 쓰기 보다는 옛글을 인용하거나 옛글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야 되는 풍조에서 기존의 관습이나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글을 자유롭고 진솔하게 썼다는 것 만으로 상촌을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솔직히 도명명의 글 같이 선생의 글은 순리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의 생각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 같이 마치 물이 차서 스스로 흘러 넘치는 것과 같아서 읽는 사람 누구나 공감을 하고 고개를 끄떡이는 그런 글을 지었다. 그래서 한동안 선생의 글만 따로 인터넷에서 모으기도 하였다. 특히 '야언'에 쓴 글을 옮겨보면...

서리 내려 낙엽질 때, 성진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등걸에 걸터 앉아, 바람결에 단풍잎이 흩날려
옷소매 위로 떨어지고 새들이 나무가지 끝에 날아와
살짝 나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 순간 황량하던 대지가 맑고 드넓다.
세상에 단 하루도 안개가 끼지 않는 아침이 없지만
그 안개가 아침을 어둡게 만들지는 못하며,
세상에 구름이 끼지 않는 낮이 없지만
그 구름이 낮을 밤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또 죽은 벗을 그리워 하는 시를 보면, 선생의 따뜻한 인간성과 벗에 대하여 가진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특시 선조, 광해군의 혼탁한 시대에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관직에 있을 때나 유배지에서도 청렴하게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안으로 조용히 승화시키며, 외부에 대한 따뜻한 품성과 모습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준다. 추포 황신(1560-1617)의 죽음에 쓴 글을 보면..

처음에 어디서 왔으며,
이윽고 떠나면 어디로 가나?
오는 것도 한때
가는 것도 한때.
나면 죽는 것 당연한 일이라
그 옛날부터 모두 그랬지.
내 진작 이를 깨닫고
가슴에 의혹 한 점 없었건만,
어찌해 이 친구 죽자
이다지도 슬픔을 견디기 어려울까?

- 本 -

1566년(명종 21, 1세)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 신승서(申乘緖)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7세) 양친을 잃고 외가에서 자라나다.

1573년(선조 6, 8세) 외조부 송기수(宋麒壽)에게 글공부를 배우기 시작하다.

1585년(선조 18, 20세)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문과에 장원급제하다.

1589년(선조 22, 24세) 예문관 검열(檢閱),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역임하다.

1592년(선조 25, 27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고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다.

1594년(선조 27, 29세)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 이때 '사행길'을 짓다.

1599년(선조 32, 34세) 장남 신익성(申翼聖)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다.

1603년(선조 36, 38세) 예조 참판, 병조 참판, 예문관 제학,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다.

1606년(선조 39, 41세)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藩)을 의주에서 맞이하다.

1608년(선조 41, 43세) 2월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집권하다. 광해군의 대사헌 제수를 거듭 사양하다.

1609년(광해군 1, 44세) 세자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다.

1613년(광해군 5, 48세)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유교칠신(遺敎七臣 : 선조로 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일곱 신하) 중 하나로 지목되어 파직되다. 양포(楊浦)) 강가에서 체류하다가 김포로 내려가다. '방옹시여서(放翁詩餘序)를 짓다.

1614년(광해군 6, 49세) 숙부 신광서(申光緖)의 집에 얹혀살다가 이해 2월 동자산(童子山) 기슭에 집을 짓고 이사하다. '선천규관(先天窺管)을 짓다.

1616년(광해군 8, 51세)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려는 것에 반대하다 죄가 더해져 이해 겨울 노량 강변에서 유배의 명을 기다리다. '산속에서 혼자 하는 말'과 '강가에서 지낸 날들의 기록'을 짓다.

관직을 잃고 쫓겨난 뒤 고향 산골에 돌아와 살면서 집 밖을 나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다가 마음속에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작은 붓을 휘둘러 종이에 적곤 했는데, 이때 씌어진 글은 기실 '혼자 하는 말'이라고 해야 좋을 것들이었다. 그 글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묶어, 내가 스스로에게 다짐을 굳게 가다듬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이에 1616년 9월 가을에 초록한다.

집 남쪽에 작은 골짝이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잡목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서 맨 먼저 잡목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섬돌을 쌓고 연못도 만들었다. 1616년 봄에는 시내 위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세웠는데,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조용히 시를 읊고 편히 쉬기에 충분했다. 이때부터 나는 세상에 나가 하고픈 일이 없었다.

나는 타고나길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까닭에 벼슬한 때부터 한 번도 아첨 떠는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관리가 됐지만 뒤처지기만 했는데, 중년에 이르러 선조 대왕의 인정을 받아서 외람되게 분에 넘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임금님의 보살핌 아래서 영화를 누리는 일은 본래 하고픈 것이 아니었으므로 당시에 나는 휴직을 청해서 반쯤 관직을 쉬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선조 대왕이 승하하시자 조정이 하루아침에 바뀌면서 갑자기 큰 화가 일어났고, 나 역시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이렇게 화를 입었다. 그러나 만약 두레박마냥 시류에 따라 살았더라면 크게 부귀를 누렸을 것이라 한다 해도, 나는 결단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변고를 하도 많이 겪어서, 점점 옛날의 역사를 들춰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옛날 역사를 보면 잘 다스려진 때는 적고 어지러웠던 때는 많아서 가슴만 아파 오기 때문이다.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진실성 여부인데, 큰 화를 겪고 나면 그 정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계축년(1613)에 변이 일어났을 때 시대부들이 보인 행동은 실로 천태만상이어서 사람마다 제각각 달랐다. 평소 도덕과 의리에 대해 말하며 명예와 절개를 자부하던 인사들이 외려 나약해지고 두려워한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가 하면, 범상한 인물로 지목되던 이들이 뜻을 굽히지 않고 떳떳이 나서기도 했다. 아! 평소에 명성이 없던 자라고 해서 훌륭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훌륭한 점이 없는 자가 끝까지 거짓 명성으로 자신을 감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겪고서 무엇을 본 받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1617년(광해군 9, 52세) 1월에 춘천으로 유배되다. '화도시서(和陶詩序)', '유배간 친구들에게', '우물이야기'를 짓다.

1621년(광해군 13, 56세) 8월에 사면되어 김포로 돌아오다.

1623년(인조 1, 58세) 부인 이씨가 사망하다. 인조반정 직 후 이조판서 및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다.

1627년(인조 5, 62세)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의 남하를 호위하다. 이 해 9월에 영의정에 제수되다.

1628년(인조 6, 63세) 6월 29일 병으로 사망하다.


 - 자료출처 : 신흠 선집(06 돌베개), 맑은 바람이 그대를 깨우거든(웅진)

 - 자료작성 : 2007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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