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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紫霞) 신위 (1769-1845)


▣ 자하선생연보

769년 (영조 45), 서울 장흥방에서 태어났다. 자는 한수(漢수)이고, 호는 홍전(홍田) 이었는데 나중에 자하(紫霞)로 바꾸었다. 그가 어렸을 때 경기도 시흥의 자하산 별장에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지은 것이다. 아버지 대승(大升, 1731-1795)은 평산 신씨의 후예로 이듬해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77년 (정조 1),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784년, 예조좌랑이던 창녕 조씨 윤형의 딸과 결혼하였다. 정실부인인 조씨(曺氏)는 끝내 자녀를 낳지 못하였다. 그의 4남 2녀는 모두 부실 조씨(趙氏)가 낳았다.

1795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00년, 의정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1812년 (순조 12), 주청사(奏請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가, 당대의 석학인 옹방강(翁方綱) 부자와 사귀었다. 청나라 시에 대해 배우고는 감동되어, 돌아와서 지난날의 시들을 태워 버렸다. 지금 그의 문집에는 1811년 이후의 작품들만 실려 전한다. 12월에 승지가 되었다.

1813년, 곡산부사가 되었다. 전염병으로 피폐된 고을을 구하려고, 세금과 부역의 탕감을 조정에 탄원하였다.

1816년, 승지가 되었다. 곡산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서 유임해달라고 간청하였다.

1818년, 춘천부사가 되었다.

1819년, 가을에 춘천부사를 사임하였다. 토호의 횡포를 억누르다가 도리어 장관으로부터 견책을 당하여 할수없이 관인을 바치고 떠난 것이다. 춘천의 백성들이 경계를 넘도록 쫓아와서 전송하며 흐느껴 우는 이들이 많았다.

1821년, 장흥방 자택에서 쉬었다. 다산 정약용 부자, 추사 김정희 등과 사귀었다.

1822년, 병조참판으로 복직하였다.

1823년,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827년, 부인 조씨가 죽었다. 3년 전부터 앓고 있던 다리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인생의 비애를 느끼고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1828년, 강화유수가 되었다.

1830년, 문조(文祖)로부터 "양연산방 (養硯山房)"이라는 친필을 하사받았다. 문조가 갑자기 죽자 외척들의 미움을 받고 7월에 강화유수를 사임하였다. 외척들에게 탐관오리로 몰렸다가 김조순의 변호로 풀려나 자하산장으로 은퇴하였다.

1832년, 도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반대당에게 탄핵당하였다. 10월 29일에 순조가 다시 도승지를 제수하여 불렀지만, 개양문 밖에서 대죄하고 입궐하지 않았다. 순조가 하룻밤 사이에 27차례나 엄명을 내려서 도승지에 취임하라고 재촉하였지만, 끝내 불응하였다. 11월 1일에 평신첨사를 제수하였다.

1833년, 3월에 사간원 대사간으로 소환되었지만 강화유수 재직시의 독직사건으로 평산에 유배되었다. 경기암행어사 이시원이 탄핵한 것이다.

1834년, 4월 유배지에서 풀려나 가을에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1835년 (헌종 1), 이조참판, 대사간,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839년, 8월 11일에 고희 잔치를 하고, 6개월 휴가를 얻어 9월부터 관북을 여행하였다. 둘째아들 명연이 홍원에 수령으로 재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44년, 76세에 노환으로 자리에 눕자,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고 녹용을 하사하였다.

1845년, 서울 장흥방 자택에서 죽었다. 자하산에 묻혔다.


 - 자료출처 : 紫霞 申緯 詩選(평민사)

 - 자료작성 : 1998. 12.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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