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프로필

Contact Us

 茶인연

 茶詩民謠

 茶文化史

 茶人

 茶/茶器/茶具/茶田

 茶寺

 茶文獻

 中國茶文化

 中國茶

 中國茶器

 日本茶文化

 日本茶

 日本茶器

 게시판

 새소식

 갤러리

  茶人

  다산(茶山) 정약용 (1762-1836)


▣ 다산선생연보

1762년 6월 16일, 경기도파주군 초부면 마현(馬峴), 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丁載遠)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다. 이해에 아버지가 어지러운 정계를 떠나 시골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어렸을 때의 자를 귀농(歸農)이라고 했다. 나중에 미용(美庸), 송보(頌甫)로 바꿨다. 관명을 약용(若鏞)이라고 했다.

1765년,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768년 이 무렵에 지은 시가 전해진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었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일세."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1770년 11월 9일, 어머니가 죽었다. 마마병의 여독으로 눈썹 위에 상처를 입어, 호를 삼미(三眉)하 하였다. 열 살 이전에 지었던 글들을 묶어서 『삼미집』 이라고 했었다.

1771년, 관직을 물러나 집에 있게 된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웠다.

1776년 2월 22일, 승지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하였다.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복직되었으므로 서울로 이사갔다.

1777년, 매부 이승훈과 이가환을 통하여 성호(星湖) 이익(李翼)의 유고를 얻어 읽고 그를 사숙하였다. 가을에 아버지의 임지인 화순으로 따라갔다.

1781년, 서울에 과거를 치렀으나 떨어졌다. 7월에 딸을 낳았지만 닷새 만에 죽었다.

1782년, 서울 창동으로 집을 사서 이사하였다.

1783년 2월, 초시(初試) 합격, 4월에 회시(會試)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회현방에 이사하여 재산루(在山樓)에 거처하였다. 9월에 큰아들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1784년 여름, 정조 임금께 『중용강의 (中庸講義)』를 바쳤다. 형 약현(若鉉)의 처남인 이벽(李蘗)에게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1786년 7월, 둘째 아들 학유(學遊)가 태어났다.

1787년, 중희당(重熙堂)애 불려가서 정조 임금으로부터 「병학통 (兵學通)」을 하사받고, 아울러 「겸유장재 특사차서」 (兼有將才 特賜此書)라는 교(敎)를 받았다.

1789년,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3월에 초계문신(抄啓文臣), 5월에 종7품 부사정(副司正), 6월에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겨울에 한강 배다리를 만드는 규제를 만들어 공을 세웠다.

1790년 2월, 정9품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3월 8일, 벽파(僻派)의 탄핵으로 서산군 해미현에 유배되었다. 13일 유배지에 이르렀지만 19일에 귀양이 풀렸다. 9월 정6품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서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791년 5월, 정언이 되고 10월에 다시 지평이 되었다. 겨울에 『시경강의』 800여 조를 바쳐 정조 임금의 칭찬을 들었다.

1792년 3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4월 9일, 아버지가 임지인 진주에서 죽었다. 겨울에 왕명을 받아 『수원성제 (水原城制)』를 지어 바쳤다. 기중기 원리를 이용하여 총경비 10만냥 중 4만 냥을 절약하였다.

1794년, 아버지의 상을 마쳤다. 7월에 정5품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연천지방을 순찰하였다. 이때 목격한 비참하고 부패한 현실이 사회시를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월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1795년 1월, 정3품 동부승지에 오르고 2월에 병조참의가 되었다. 3월에 우부승지가 되었다. 「주문모신부사건」에 연좌되어 7월에 충청도 금정 찰방(종6품)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성호유고 (星湖遺稿)를 정리하였다.

1796년 10월 규영부(奎瀛府) 교서(校書 5품에 해당)가 되었다.

1797년 윤6월, 천주학을 신봉한다는 죄로 종3품 황해도 곡산부사로 좌천되었다.

1799년 4월에 정3품 병조참지, 5월에 형조참의가 되었다. 6월에 노론벽파 (老論僻派) 의 무고에 의해 『자명소 (自明疏)』를 올리고 사직하려 했다.

1800년 봄, 처자를 데리고 광주군 마재 시골집에 내려갔다. 왕명으로 다시 올라왔지만 6월 28일에 정조임금이 승하하여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당호를 여유당 (與猶堂)이라고 하였다.

1801년 2월 9일 정원의 논계로 옥에 갇혔다. 3월 경상도 장계로 유배되었다. 이때 둘째형 약전(若銓)은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세째형 약종(若鐘)은 감옥에서 죽었다. 10월에 「황서영백서사건」으로 다시 붙잡혀서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다.

1803년, 강진에서 석교(石橋)로 자하산(紫霞山)으로 옮겨 다녔다.

1805년 겨울,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기에, 관은산방(寬恩山房)에서 「주역」, 「예기」 등을 가르쳤다.

1808년 봄에 강진군 만덕리 귤동에 있는 윤박(尹博)의 다산초암(茶山草庵)으로 옮겨 왔다.

1817년,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에 착수하였다.

1818년 봄에 「목민심서」 48권이 이뤄졌다. 8월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귀양이 풀려서 다산을 떠났다. 9월 14일에 마재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다. 글벗, 제자들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왔다.

1827년 10월에 윤극배(尹克培)가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마침내 죄 없음이 드러났다.

1836년 2월 22일, 진시(辰時) 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죽었다.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묻혔다.

1910년 7월 18일,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를 문도공(文度公)이라 하였다.

1934-38년, 정인보, 안재홍, 김춘동이 교정한 『여유당전서』 76책이 신조선사에서 간행되었다.


 - 자료출처 : 茶山 丁若鏞 詩選(평민사)

 - 자료작성 : 1998. 12. 25일


 '茶人'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