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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梅月堂 金時習 (1435-1493)


- 序 -

매월당 이 글을 쓰게된 동기는 일본 室町時代 草庵茶의 원류가 조선에서 갔으며, 그 뿌리는 매월당이 경주 金鰲山室에 기거하고 있을 때 염포(울산)에서 일본승 俊長老와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가 쓴 "한국 속의 일본" 이란 책에서 읽은 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책과 자료를 모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매월당의 지나온 흔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나 글이 없어서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서 일본 草庵茶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매월당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가 죽은 지 18년 되는 해 중종이 그의 시집을 엮으라는 명에 의해 그의 시들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이자(李자 1480-1533)의 10년에 걸쳐 3권을 수집한 하였고, 李山海(1538-1609)의 "梅月堂集序"와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이 편집 간행한 "매월당선생전"이 있으며, 또 1582년 栗谷 이이(1536-1584)가 선조의 왕명을 받아 지어 올린 "김시습전(奉敎製進)"을 지어 바치면서 매월당이 心儒跡佛했다는 변론을 바탕으로 영조 6년(1782)에 吏曹判書에 追贈되었다.

- 本 -

세종 17년(1435)에서 성종 24년(149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출생한 지 8개월만에 글을 알았으며,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라는 시를 읊었다고 하며,

5세때 中庸, 大學에 통달하였으며, 글짓기도 더 한층 진보되었다. 그의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許稠)가 시습의 집을 방문하여 시험하여 보았다. 노(老)자로 운(韻)을 달아서 지었는데, "老木開花心不老" 지어 놀라게 했다.

세종이 5세의 시습을 불러오도록 승정원(承政院)에 분부를 내리면서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詩로써 시험하여 보게 한 후,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김시습을 오세(五歲)라고 즐겨 불렀다.

13세(1447) 때까지 김양(金洋)과 윤상(尹祥 1373-1455)의 문하에서 四書六經을 공부하였고, 그 후에는 누구에게 師事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15세(1449)되는 해에 어머니를 여의어 강릉 선영에 장사를 지내고 아버지와 함께 고향 강릉으로 낙향하여 외조모(강릉)에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조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즉 문종 원년(1451)에 서울로 온 듯하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17세(1451) 부터 18세(1452)년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결혼도 하였으나 순탄하지 못하였으며, 또 어지러운 세상 대한 회의와 날로 깊이를 더 하는 학문이 어느듯 불교에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마음은 불가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으나 1452(문종2)년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였다. 이때 수양대군은 단종의 어머니가 궁녀로 정식간택과 가례를 치른것이 아니라 단종을 출산하고 죽어 나중에 왕비로 되었기에 그 몸에서 난 아들인 단종은 적자가 아니고 서출이므로 문종이 승하했으니,

세종의 2째 왕자인 자신이 왕통을이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국 전복의 음모를 자행하여 이듬해 단종1년(1453)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킨후, 마침내 단종 3년(1455) 6월 11일에 상왕으로 선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세조 원년(1455) 21세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불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때를 기술한 本傳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景泰六間에 英陵(세종)과 顯陵(문종)이 차례로 서거하였으며 魯山(단종)이 3년만에 遜位하였다. 이때에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 속에서 독서하던 중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 부터 소식을 듣게 되자 곧 문을 닫아 걸고 3일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대곡한 후, 읽고 쓰던 글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에 가탁(假托)하였으며 승명을 설잠(雪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위에 촉망받았던 그가 21세에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만 했다는 사실과 峻上人에 대한 贈詩 二十首의 題辭에 적은 내용을 보면 그의 나이 18세(1452)인 壬申年에 송광사에서 올라온 峻上人과 함께 지내면서 불교 공부에 끌려 매일 참선을 했다는 것은 그 때 이미 出家山門이 되었지 않나 하는 심중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출가를 본전 및 윤전의 기록보다 적어도 3년 이상 끌어 올릴 수 있다. 즉 그의 나이 21세 때에 삼각산에서 유학(儒學) 했다가 보다 그때 이미 雲水衲子였지 않나 생각된다.

세조 2년(1456) 성삼문 등이 이른바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 관련된 신하들이 모두 사형 당하였다. 젊은 학자들이 주축이 된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을 정지시켰다.

세조 원년(1455)에서 세조 3년 초봄까지의 기간은 삼각산 중흥사를 뛰쳐나온 뒤 여러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단종의 복귀를 도모하다가 처형된 사육신 소식을 듣고 남추강과 함께 죽임을 당하여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육신의 시신을 밤을 틈타 몰래 업어다가 아차고개(노량진의 아차산)의 남쪽 기슭에 묻고, 표석을 세운 뒤 서로 기록한 후, 공주 동학사에 이르러서 남추강과 함께 동학사 초혼기(영혼을 부르는기록)라는 글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錦溪筆談)

1457년(세조 3) 정월에 세조는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였다. 6월에 상왕인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다가 노산군 복위 사건이 발각되자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아마 매월당의 첫 방랑길은 노산군의 죽음 무렵이었을 것이다.

세조 3년(1457) 23세 늦봄에 첫 방랑길을 나섰다. 松都에 다다르기 직전에 쓴 시로 미루어 늦봄인 듯 하다. 松都에서 扶蘇山(松嶽)을 읊은 시에도 "春水花叢"이란 표현이 보인다. 삼각산을 떠난 뒤로부터 관서로 유행길을 나서기 까지에는 두해 가까운 세월이 흘렸다.

평양, 청천강, 묘향산을 거치면서 명승을 찾고, 고도, 고적, 옛 싸움터를 둘러 보았다. 이때 그가 지나온 발자취를 적은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後志를 戊寅 가을 24세 때 썼다.

세조 5년(1459) 25세 봄에 일단 서울로 돌아왔다가 배꽃이 필 무렵 관동으로 향했다. 그 행로는 포천, 금화로 하여 금강산을 돌아보고 다시 서울을 거쳐 대전까지 내려갔다. 단발령을 넘어 돌아오기 전 "不如歸"를 읊으면서 남하 하였다.

대전을 거친 후, 다시 서울 근교에서 겨울을 나고 봄(1460)에 龍門山, 驪江을 거쳐 원주로 향했다. 월정사, 상원사를 보고 강릉으로 하여 평창의 객관에서 세모를 보냈다. 다시 새봄에 길을 나서 영월을 끝으로 관동유행을 마쳤다.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後志를 庚辰 가을 26세(1460) 때 썼다.

세조 7년(1461) 27세 때 청주로 하여 호남유행을 낙엽지는 가을에 올랐다. 금산사, 내장산을 거쳐 나주로 가면서 백제고사를 시제로 많이 삼았다. 겨울을 나고 광주에서 무등산을 오르고 그 길로 송광사를 찾았다.

늦가을에 다시 남원 광한루에 올라 지리산을 바라보며 함양으로 하여 해인사로 갔다. 伽耶洞에서 孤雲의 유적을 찾아 천고의 풍류를 노래했다.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뒷말은 癸未 가을 29세 때 이다.

그의 발길은 이제 경주의 유적을 둘러보고 탕유금오록(宕遊金鰲錄)의 뒷말을 癸巳 봄 39세 때이다.

세조 9년(1463) 29세 때 효령대군(1396-1486)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다.

세조 11년(1465) 31세 되던 봄에 경주 남산(金鰲山)에 들어가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필묵을 벗삼아 평생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그해 3월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하여 세조의 숭불사업을 찬양하는 글을 써기도 했다.

圓覺寺落成會詩序에서 그는 "乙酉春에 金鰲山室을 짓고 들어앉아 거기서 삶을 마치려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다시 경주 남산으로 내려왔다.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68, 34세)을 썼다.

이 金鰲기간(31세 ~ 37세)이 그의 일생중 가장 안정된 생활을 보내면서 창작활동에 몰입한 시기였다.

이곳에서 성종 원년(1470, 36세) 까지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성종 6년(1475) 41세에 十玄談要解를 註釋하였으며, "산거백영 후지"(76)를 42세에 썼다.

매월당의 城東生活은 세조의 죽음 후, 그나마 현실 참여에 대한 미련과 세종의 총애로 이어진 왕실 정통성으로 상처입은 마음의 갈등이 어느때 보다 증폭된 시절이었다.

즉 세조조에서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어버리고 아예 체념을 하고 살았지만 성종대에서는 혹시 하는 생각과 나이기 40대에 이르러고 보니 세상에 태어나 마지막일 지 모르는 자신의 공부를 세상에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간절할 수록 또 한편의 마음속에는 세종, 문종, 단종을 받들지 못한데서 오는 마음 병의 고통으로 또다시 세상을 엉거주춤하게 보내게 된다. 어떤 이는 이런 환경을 도연명의 생활과 비교 하기도 하지만 도연명과는 그 원인의 뿌리부터 다르다.

성종 12년(1481) 47세때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처자가 모두 죽자 성종 14년(1483) 49세에 다시 서울을 등지고 還山하였다. 本傳에는 그가 환속함에 있어 지었다는 祭祖父文은 다음과 같다.

舜이 五敎를 베풀되 父子有親을 으뜸으로 하였으며, 죄가 3천가지로되 不孝를 제일로 칩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자로서 그 누가 養育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어리석기만 한 小子 조상의 뒤를 이었으되 異端에 빠졌다가 末路에 와서야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禮典을 상고하고 聖經을 뒤져서 조상 받드는 큰 뜻을 결정하고, 청빈한 살림을 참작하여 간결한 것으로 정성을 다하나이다. 漢武帝는 일흔살에 처음으로 田丞相의 말을 깨달았고, 元德公은 백 살이 되어 비로서 許魯齋의 풍화를 따랐습니다.

성종 14년(1483) 49세때 다시 環山하면서 관동으로 들어간다. 관동으로 간 이유는 병약한 몸으로 가고싶은 金鰲行의 이정이 너무 멀기도 하여 가까운 주위에서 심신의 피곤을 풀고 또 선영 가까이서 거처하고 픈 생각이었을 것이다.

서울을 떠나면서 먼저 거처를 정한 곳은 춘천이었다. 춘천에서 생활한 것에 대한 그의 시(시집 十四 春思) 중에서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호구책으로 경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서글픈 여생을 탄식하고 있다.

춘천에 일정기간 머물다가 다시 200백리 길을 걸어 강릉으로 거쳐를 옮겼다. 양양, 강릉 사이를 오가며 지내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양양부사로 와 있던 柳自漢이 매월당의 병들고 어려운 생활상에 동정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도움에도 작농이 궁하여 산채나 약초를 캐어 연명할 지경이었고,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모든것이 힘들었다. 그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보지 못한 오랜 친구들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성종 22년(1491) 57세때 서울에 올라와 남추강 등과 오랜만에 회포를 나누었다.

이때 한때 남추강이 부여 고도에서 즐겁게 보낸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결심한 바 있어 설악으로 돌아온 후, 그동안의 생활을 정리하고는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부여행으로 길을 올랐다.

부여 무량사에 도착하였으나 가뜩이나 병들은 몸은 무리한 방랑 여독에 더욱 주체할 수 없었다. 무량사 선방에서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면서 쓴 시에는 이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듯 하다.

성종 24년(1493) 2월 59세때 충남 부여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쳤다. 화장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대로 두었는데, 3년후 茶毘하고자 殯室을 열었는데 안색이 생시와 같이 살아 있는 듯하여 승도들이 놀라면서 雪岑이 成佛하였다고 本傳은 적고 있다.


 - 자료출처 : . 강릉김씨 종친회보

                   . 韓國속의 日本(이진희著)

                   . 梅月堂 金時習 詩選(허경진역음)

                   . 梅月堂-그 文學과 思想(강원대학교편)

                   . 차문화유적답사기(김대성著)

                   . 조선왕조실록(단종, 세조)

                   . 錦溪筆談(명문당), 그외 다수 참조

 - 자료작성 : 1998. 6.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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