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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畢齋 김종직 (1431-1492)


가. 점필재선생연보

나. 다원이야기


가. 점필재선생연보

1431년(세종 13) 6월에 밀양부 서대동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이고, 어머니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아버지는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선산에서 밀양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1436년 6세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활쏘기와 산수도 배웠다.

1443년 13세 아버지가 고령현감으로 있으면서, 아들 형제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1446년 16세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였다. <백룡부(白龍賦)>를 지었다가 낙방했지만, 태학사 김수온이 낙방된 시권을 보다가 이 글을 읽어 보고는, 장래에 대제학이 될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세종에게 이 글을 보이자, 세종도 기이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면서 영산훈도 (靈山訓導 종9품)를 제수하였다.

1451년(문종 원년) 21세 울진현령 조계문의 딸에게 납채(納采)하였다.

1455년(단종 원년) 23세 봄에 진사에 합격하고, 겨울에 결혼하였다.

1455년(세조 원년) 25세 큰형 종석과 함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베푸는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다.

1456년 26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459년 29세 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 (副正字 종9품)에 제수되었다.

1460년 30세 봄에 승문원 정자(정9품)로 승진하였다.

1461년 31세 승문원 박사(정7품)로 승진하였다.

1463년 33세 사헌부 감찰(정6품)로 승진하였다.

1464년 34세 제자들이 모여들어 거리에 넘쳤지만,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1465년 35세 영남병마평사(정6품)가 되어, 여러 고을의 병마를 점검하였다.

1467년 37세 홍문관 수찬(정6품)이 되었다.

1468년 38세 이조좌랑(정6품) 겸 교서관 교리(종5품)가 되었다.

1469년(예종 원년) 39세 예문관 응교(정4품)가 되었다.

1470년(성종 원년) 40세 고향으로 돌아가서 71세된 노모를 모시겠다고 청하자, 함양군수(종4품)에 제수되었다.

1471년 41세 9월에 봉렬대부(정4품), 12월에 봉정대부(정4품)에 오르다. 유자광이 이 고을에 와서 놀다가 시를 지어 현판을 붙었는데, 점필재가 보고 곧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1472년 42세 봄, 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정여창과 김굉필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1473년 43세 중훈대부(종3품)에 올랐다.

1474년 44세 첫아들 목(木)이 5세였는데, 홍역으로 죽었다. 다원(茶園)을 만들어,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차를 재배하였다.

1475년 45세 통훈대부(정3품)로 승진하였다. 함양을 떠나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1476년 46세 승정원사에 취임했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선산부사(종3품)로 부임하였다.

1479년 49세 12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481년 51세 어머니의 산소를 지키는 동안, 남양 향리의 아들 홍유손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1482년 52세 홍문관 응교(정4품)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정3품)에 임명되었다. 부인 조씨가 죽어, 금산에 장사지냈다.

1483년 53세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1484년 54세 승정원 도승지(정3품) 겸 예문관 제학(종2품)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이조참판(종2품)에 임명되었다.

1485년 55세 사복첨정 (司僕僉正 종4품) 문극정의 딸과 재혼하고, 명례방(명동)에서 살림하였다. 여름에 병들어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10월에 홍문과 제학(종2품)으로 승진하였다.

1486년 56세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어 <동국여지승람>을 정리하였다. 7월에 아들 숭년(嵩年)을 낳았다.

1487년 57세 전라도관찰사(종2품) 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10월에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청구풍아 (靑丘風雅)>, <동문수 (東文粹)>,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었다.

1489년 59세 3월에 형조판서(정2품) 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가을에 병으로 사면하고 지중추부사(정2품)에 제수되었다. 동래온천에 와서 휴양한 뒤에,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1490년 60세 많은 학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글을 배웠다.

1491년 61세 병이 위독하자, 왕이 약을 하사하였다. 밀양에 노비 15명을 내려주고, 동래 온천에도 논 7마지기를 내려주었다.

1492년 62세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7월에 다 돌려주었다. 8월에 왕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였지만, 그 달 19일에 명발와(明發窩)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아들 숭년이 7세 밖에 되지 않아, 정부인 문씨가 상주가 되었다. 제자와 인근 선비 500여 명이 모여 장사지냈다.

1493년 63세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내렸다.

나. 다원이야기

나라에 바치는 차(茶)가 우리 고을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데도 해마다 백성들에게 이를 부과하였다. 백성들은 차값을 가지고 전라도에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얻었다. 내가 처음 이 고을에 부임하여 그 폐단을 알고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스스로 여기저기 구걸하여 납부하였다.

그러다가 한번은 <삼국사기>를 열람해 보니, "신라 때에 당나라에서 다종(茶種)을 얻어와 지리산에 심도록 명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아, 우리 고을이 바로 이 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에 남긴 씨가 없겠는가.

그래서 부로(父老)들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 속에서 두어 떨기의 다종(茶種)을 발견하게 되었다. 너무 기뻐서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게 하고, 그 부근의 백성들 땅을 모두 사들여 관전(官田)으로 보상해 주고 차를 재배했다.

몇 년이 지나자마자 제법 번식하여 다원 전체에 두루 퍼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4~5년만 기다리면 나라에 바칠 액수를 충당할 수가 있게 되었다.


 - 자료출처 : 점畢齋 金宗直 詩選(평민사)

 - 자료작성 : 1998. 12.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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