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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文化史

  錦堂茶話 - 草衣 出生地 (1978년 發行)


▣ 序

▣ 草衣의 出生地를 찾아서


▣ 序

우리의 차문화에 많은 공적을 쌓으신 초의 스님의 흔적은 근대를 지나면서 끊어져 있었다. 대흥사 주지 스님으로 50여년을 지내신 응송 스님이 대흥사를 타의로 떠나면서 초의 다맥은 끊어진 것이다.

그런후 70년대 중반 무렵 금당선생이 다시 일지암의 장소와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탐방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흔적을 찾으려 하지 않는 사라진 존재였다. 그런 시기에 금당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하나하나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런 사실은 어디에도 없이 초의 다맥을 이었다는 스님이 있고, 일지암과 초의 선사의 출생지를 복원하고 자신들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누가 알겠는가? 이런 사실들의 起承轉結이 없이 또 수백년이 흘러간다면...

본인의 생각으로 초의 다맥은 분명 끊어진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대처승과 비구승과의 갈등)에 응송 스님이 떠나면서 누구 하나 그 분의 참뜻을 잇는 이 없었고, 단지 껍질만으로 모든 사물을 구분하고자 하던 시기가 분명 佛家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茶人으로서 초의 스님을 흠모한 금당선생의 일들을 그나마 알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여기에 적어 본다.

▣ 草衣의 出生地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는 조선조말(朝鮮朝末)인 18세기 후기에 비로소 일정한 양식이 정립(定立)되었다.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시킨 분은 초의(草衣)스님이다. 물론 그 무렵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선생,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선생도 차에 대하여 조예(造詣)가 깊었고 그들의 문헌(文獻)이 있지만,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등 차에 관한 체계적으로 저술한 초의 스님의 공적으로 따르지 못한다.

1953년 3월호 「한국문학(韓國文學)」지는 자료연구실 발굴 작품이라 하여 「다신전」과 「동다송」에 관해서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초의 스님의 출생지가 전라남도 나주군 삼향면(全羅南道 羅州郡 三鄕面)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삼향면은 상당히 넓은 지역인데, 삼향면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서 초의 스님이 출생하셨는 지를 불교계(佛敎界)나 초의 스님의 다사(茶史)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제껏 상세히 밝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의 스님은 조정(朝廷)으로부터 보제존자 초의대선사(普濟尊者 草衣大禪師)의 사호(賜號)를 받으신 대종사(大宗師)였고, 거유(巨儒), 재상(宰相), 장군(將軍), 시인(詩人), 화가(畵家)들과 서로 내왕하면서 두터운 교의(交誼)를 가졌을 뿐만아니라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손꼽혔던 고승(高僧)이었다.

이렇게 이름난 고승의 출생지를 밝히는 것은 초의 다사(草衣 茶史)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나 당시의 고승(高僧)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으로 안다.

초의 스님의 속명(俗名)은 장의순(張意恂) 조선조말 1786년 나주군 삼향면에서 출생, 6세 때 나주군 다도면 암정리(茶道面 岩亭里) 운흥사(雲興寺)에 입산(入山)하여 1866년 81세로 열반(涅槃)하셨다.

초의 스님은 전국 곳곳의 절과 명승지를 주유(周遊)하시면서 참선(參禪)과 설법(設法)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초의 스님은 모찰(母刹)을 해남 대흥사(海南 大興寺)로 정하셨다.

40세가 지나자 초의 스님은 대흥사 뒷산에다가 일지암(一枝庵)을 창건, 그곳에서 열반(涅槃)하실때까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정유산(丁酉山), 신자하(申紫霞), 신관호(申觀浩), 윤학전, 심수군 제공(諸公)과 더불어 다도(茶道)를 논하고, 시(詩)를 지으셨는가 하면 그림을 그리시고 음식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정원(庭園)을 가꾸셨다.

초의 스님은 또 수석(水石)과 분재(盆栽)를 즐기시고 차를 심어 만드셨다. 초의 스님을 특히 차를 달이는 물을 시험하시고 열(熱)을 조정하셨는가 하면 차 마시는 법을 가르치고는 문장과 차에 대하여 백 가지 처방을 연구하신 분이다.

초의스님은 이렇게 이름난 큰스님이시기에, 삼향면에 있는 장씨 집단부락(張氏 集團部落)을 찾아 장씨 일문(張氏 一門)에게 묻고 다니노라면 기필코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알 도리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지금부터 1백20년 전의 일이니까, 불과 4대(代)만을 거슬러 올라가는 세월이 아닌가!

1976년 10월 어느날, 나는 초의 스님의 구체적인 출생지를 찾아 나서기로 작정하고 목포(木浦)로 갔다. 목포에 있는 실업가인 조양운수주식회사 김윤수 회장을 방문하고 찾아 온 뜻을 말했다. 그러자 김 회장이, 삼향면 일부가 목포시 행정구역으로 편입됐고, 또 삼향면에는 장씨 일문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귀띰해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내심으로 기뻤다.

김회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삼향면 유지 박문석씨를 방문, 삼향면에 거주하고 있는 장씨 문중의 유지를 소개받았다. 박문석씨를 따라 동북으로 약 1킬로쯤 가서 해발 2백미터인 적덕산(積德山) 남쪽 기슭에 살고 있는 장씨 일문중 최연장자인 장재수(張在洙)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올해 85세인 장 노인과 인사를 나눈뒤 찾아온 까닭을 밝혔다.
『어르신네 문중에서 출가한 스님 가운데 호남 제일의 고승(高僧)이신 장의순(張意恂)씨라는 분을 아십니까?』
『금시 초문이 올시다.』
『그 스님의 법명(法名)은 초의대사라고 하는데, 혹시 그런 스님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으신가요?』
『여기 삼향면에 사는 우리 인동장씨 무안파(仁同張氏 武安派) 중에는 그런 분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어쨌거나 족보(族譜)를 한번 보실까요?』

장 노인은 그의 손자 장성경군을 시켜 족보 20여권을 몽땅 내오게 했다. 장 노인과 나는 그 족보를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어느 한 구석에도 「장의순」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 헛물만 켰다. 20여권의 족보를 들고 나온 순간, 「저 속에 '장의순'이라는 이름이 행여 나오겠거니......」 하는 기대에 부풀었던 만큼 실망도 커서 온몸에서 맥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으로 몸이 나른했다.

이런 나를 보고 민망했던지, 장 노인이,
『이곳 삼향면에는 장씨가 약 40호 살고 있습니다. 그 종손(宗孫)되는 사람이 목포 재판소 앞에서 사법대서소를 하고 있는데, 장원택(張元澤)이라는 사람이지요. 그 양반을 찾아가서 물어 보면 혹시 알 도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구먼요.』
이렇게 나를 격려해 주었다.

고마운 인사를 남기고 나는 다시 발길을 목포로 돌렸다. 목포에 닿자 나는 장 노인이 소개해 준 재판소 앞 사법대서소로 장원택씨를 찾아갔다. 장 노인을 만나 소개받은 이야기며 찾아 온 뜻을 대충 설명하곤 본론(本論)을 끄집어냈다.

『호남 제일의 고승인 장의순이라는 분의 출생지가 무안군(武安郡) 삼향면으로 돼 있는데, 혹시 웃어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없읍니까?』
『글쎄요......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못들어봤는데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딱지를 맞고 나니 눈앞이 노랗다.

초의 스님의 출생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이날 따라 유달산(儒達山)의 산그림자가 험상 궂게만 보였고 나의 갈길을 가로막는 것처럼 답답하게 여겨지기만 했다.

때마침 목포 근해 신안군(新安郡) 지도(智島) 앞바다 송.원대(宋.元代)의 침몰선(浸沒船)에서 건져 올렸다는 도자기라도 감상해서 마음을 달래려고 골동상을 찾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어느 가게 할 것 없이 주인이 모두 행방을 감추고 없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도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못찾고 돌아서야 하는 나의 발걸음은 천만근(千萬斤)의 쇳덩어리처럼 무겁기만 했다.

불가(佛家)에서 흔히 하는 말마다나 인연이 없는 것일까 하고 자탄(自嘆)도 해봤으나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힌 채 풀리지 않았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초의 스님은 1백20년 전 무렵 호남 뿐만 아니라 전국에 이름을 떨쳤던 큰스님이셨다. 게다가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하신 초의 스님이 아닌가! 이런 분의 출생지를 못 찾다니 될 말이랴!

초의 스님이 6세 때 출가(出家)해서 입산(入山)한 운흥사(雲興寺), 그리고 40년 동안 스님이 거쳐하셨다는 일지암(一枝庵). 모두 폐허가 돼버렸겠지만 그 흔적이라도 찾고야 말겠다는 일념(一念)이 다시 용솟음쳤다.

『훗날 다시 계획을 세워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기어코 찾아내자!』
나는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에 채찍질을 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11월 16일. 다시 부산을 출발. 한달을 집에서 쉬고 큰 마음을 먹고 다시 나서는 길인데 날씨는 사지(四肢)가 오르라들만큼 맵고 찼다.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운흥사를 거쳐 해남군 대흥사(大興寺) 동구(洞口)에 계시는 응송(應松) 스님을 찾아 뵈었다. 응송스님은 예전에 대흥사 주지(住持) 스님으로 50여년을 지내신 분이다. 응송 스님을 만나 뵌 것은 초의 스님의 저서 원본(著書 原本)을 비롯해서 초의 스님에 관계되는 자료를 보기 위해서였다.

85세의 나이에도 아직 정정한 응송 스님이었다. 정면 다섯 간, 측면 네 간의 묵은 기와집의 널따란 정원 안에는 수석(水石)과 분재(盆裁)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어, 아늑한 정취(情趣)가 넘쳐 있었다. 동.서로 심어 놓은 매화나무와 동백나무 밑에는 만년청과 난초가 소담(素淡)하고 청아(淸雅)한 멋을 풍기고 있는, 가히 호남 제일의 명원(名園)이라고나 할까...

응송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서재(書齋)에 들어서자 근대 한국의 유명하신 분의 서화(書畵)가 수십점이나 걸려 있어 나의 마음을 압도했다. 또 필상(筆床)이 있고 서가(書架)에는 고서(古書) 전적(典籍)들이 즐비했다.

차(茶)를 달여 내주시기에 그 차의 내력을 물었다. 그랬더니, 응송 스님이,
『이 차는 초의대사(草衣大師)가 개발한 大興茶泉(대흥다천)이 올시다.』
이러시지 않는가!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내 귀를 의심하면서,
『초의 스님이 개발하신 대흥다천이라고요?!』
무심결에 묻는 나의 말이 소리 높게 떨려 나왔다.

草衣禪師 碑 『예, 그렇소만, 왜 놀라시지요?』
『아, 예. 다름이 아니라 제가 다도(茶道)에 취미를 갖고 있는 터여서 초의 스님에 관해서 알고 싶었던 참입니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물었다.
『글세올시다.』
응송 스님 역시 초의 스님의 출생지가 삼향면인 줄로만 알고 있을 뿐, 어느 마을인지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초의 스님의 성장(成長)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초의대사가 다섯살 적이시라던가요. 개천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그를 지나가던 사람이 구제했다는 얘깁니다. 이런 사실이 초의대사 비문(碑文)에 적혀 있으니까, 혹시 큰 개천이 흐르고 있는 삼향면 어느 골짜기가 초의대사의 출생지가 아닐까요?』

응송 스님이 이런 말도 도시 구름잡는 격 밖에 안된다. 시골치고 골짜기가 없는 곳이 어디에 있고 그 숱한 골짜기를 일일이 어떻게 답사하고 다닐 수가 있을지, 난감한 일이었다.

응송 스님은 당혹(當惑)해 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 안됐던지,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한 가지 보여 드릴 게 있읍니다.』
이러시더니, 서실(書室)로 들어가시는 것이었다. 한참만에 서실에서 나온 응송 스님이 손에 뭔가를 들고 나오셨다.
『새로운 자료가 나왔읍니다.』
응송 스님이 이러시면서 한지(韓紙)에 또박또박 쓰인 초의대사 자필(自筆)의 가보(家譜)를 보여 주셨다. 그 가보는 다음과 같다.

家譜
嚴父 癸卯生 誕日·四月 二十三日 忌日·九月 初五日
慈母 甲辰生 誕日·四月 初六日 忌日·三月 十二日
長兄 癸亥生 生日·冬 二十九日 甲時 忌·乙丑 七月 十八日
仲兄 丙寅生 生日·十二月 二十六日 辰時 忌·壬戌 五月 三十三日
仲兄 辛未生 生日·三月 十日 子時
弟 癸未生 生日·三月 八日 午時

이것은 초의 스님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런데 그 가보를 보니 가족들의 생년 월일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름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아서 실망했다.

草衣禪師 浮屠

초의 스님은 대흥사 경내(境內)에 2백여 간이나 되는 속칭 새절(寶蓮閣)을 지으신 뒤 일지암(一枝庵)으로 들어가실 적에 가족 관계를 비롯한 속계(俗界)하고는, 마치 활통속에 화살 넣듯이, 인연을 끊으셨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응송 스님초차 알 도리가 없으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응송 스님의 말씀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초의 스님의 효성(孝誠)만은 대단하셨다는 것이다.

응송 스님에게서 새로운 자료를 얻고 11월 19일 오후 3시 목포시 석현리에 사는 박문석씨를 다시 찾아갔으나 박문석씨는 없었다. 박문석씨가 경영하는 정미소(精米所) 사무실에 들러 추위를 풀고 있는데 쌀을 찧으러 노인들이 몇몇이 찾아왔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말대로, 별 기대를 걸 생각도 없이 그 노인네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어, 혹시 삼향 쪽에 있는 장씨 문중 가운데 옛날부터 대대로 살고 있는 집안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삼향에 있는 장씨요? 있지요.』
그 중 한 노인이 불쑥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있읍니까? 그 분이 어디 사는 누군가요?』
어떻게나 반가왔던지 나는 다짜고짜로 그 노인 곁으로 다가서서 재우쳐 물었다.
『예에, 저어 삼향면 유교리에 가면언......』

뭐 한 가지라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느릿느릿 꺼내는 노인네들 특유의 지루한 말씨였다. 그러나 답답한 쪽은 나여서 그저 공손히,
『예! 예!』
하고 말 중간나다 응대를 하면서 나는 열심히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노인의 장황한 말 가운데 내가 알고 싶은 점만을 요약하자면, 삼향면 유교리에 여러 대(代)를 거쳐 살아온 집안의 후손으로서 장계철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유교리로 갔다. 석현리에서 광고 ~ 목포간 국도(國道)를 따라 북쪽으로 8킬로쯤 가니까 오른쪽으로 꺾어드는 길이 났다. 이 길을 따라 6백미터 가량 들어간 이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기와집이 장계철씨의 집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탁 트인 넓은 정원에 해송(海松)을 비롯해서 동백나무, 감나무들이 알맞게 우거져 있었고, 수석(水石)이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장노인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사랑으로 안내해 줬다. 방안에는 현판(懸板)이며 고서적(古書籍)들이 벽을 메우고 있었다.

『지금부터 1백20년 전 호남 제일의 고승으로 초의대사 장의순(張意恂)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의 고향이 삼향면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혹시 선생의 장씨 문중에 그런 스님이 계셨는지를 알고 싶어 찾아 왔습니다.』 내딴에는 큰 기대를 걸고 찾아온 뜻을 밝혔다. 그러나 장계철씨의 대답은 나에게 실망만 안겨 주었다.

『내 나이가 지금 칠십 둘이오. 말씀하시는 내용이 과히 오래 전의 일이 아니어서 알 만한데...... 글쎄올시다. 우리 문중에는 그런 웃대 어른이 안 계신데요. 제 웃대 어른 가운데 중이 됐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읍니다.

장계철씨의 이 말에 나는 한숨만 푸욱 내쉬었다. 이런 나를 보기가 딱했는지, 장계철씨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삼향면에는 두 장씨가 있소. 하나는 우리 인동장씨(仁同張氏)고, 또 인동장씨 말고도 왕산리에 가며는 흥성장씨(興城張氏) 일족이 살고 있습니다. 왕산리에 사는 흥성장씨 중에 대대로 살아온 유명한 풍수(風水)가 있었는데 년전에 작고(作故)했구먼요. 그 아들되는 장광문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시지요. 혹시 알 도리가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라고 아주 자상하게 가르켜 주었다.

유교리에서 왕산리까지는 10릿길. 장계철씨가 일러준대로 장광문씨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장계철씨와 작별 인사를 하고 큰길을 나왔다. 이때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서산(西山)에 지려고 하고 있었다. 겨울 날씨에 해까지 지고 있으니 추위가 여간 아니었다. 게다가 기운이 없어 걷기가 힘겨웠다.

『어떻게 하지? 10릿길이라, 에라! 가는대로 가 보자.』
나는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는 시골길을 바지런히 걸었다. 10리쯤 왔을까? 마침 조선일보사 무안 양어장(養魚場)이라는 말뚝 표지(標識)가 보였다. 이 무안 양어장 둑을 따라 걷노라니까 조그만 산언덕 고개에 이르렀다.

그 고개를 넘어 왕산리 동구(洞口)에 닿았다. 여기에도 여느 시골 마을어귀에 있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떡 버티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 우뚝 솟은 왕산(王山)! 그 모습이 떠놓을 데가 없는 왕관(王冠)의 생김새이다. 그래서 산 이름이 왕산이요. 마을 이름도 왕산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서쪽 하늘 저 아래 멀리로 신안군 지도(新安郡 智島) 앞바다가 보인다. 왕산은 주산(主山)이요, 이 왕산 남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 수풀에 싸인 산가(山家)가 있고 계곡과 바다와 섬과 돛배...... 그리고 어디서 놀다가 둥지를 찾아드는 날으는 새. 한 폭의 동양 산수화(山水畵)가 이보다도 더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묻고 또 물어 겨우겨우 찾아든 장광문씨의 집은 싸릿문도 없는 초가 삼간 돌담집이었다. 장광문씨는 마침 밭갈이를 나가고 없었다. 초가 삼간 아랫채에는 돼지우리가 있었고 추수를 한 짚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꿀꿀대는 돼지 소리와 모이를 쪼고 있는 닭의 꾸꾸꾸 소리 뿐,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울타리도 없는 마당에서 무료하게 서성거리고 있노라니까 장광문씨가 소를 몰고 돌아왔다. 인사를 드리고 찾아온 뜻을 말했으나 장광문씨는 한동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더구나 그는 나의 경상도 사투리가 알아듣기 힘든 것 같았다. 나 역시 시골에서만 살아와서 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장광문씨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대화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쪽은 귀머거리, 한쪽은 반벙어리 모양이라고 할까? 이 좁은 떵덩어리, 더구나 이웃하고 있는 영남과 호남의 말이 서로 이렇게도 안 통하다니...... 정말 답답한 일어었다.

『광문씨 선친(先親)이 유명한 풍수였다지요?』
그렇지 않아도 평소 빠른 내 말씨인데다가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 때문에 장광문씨는 어정쩡해 있었다.
『광문씨, 선친이, 유명한, 풍수, 라지요?』
이건 마치 영어 회화 초보생이 하는 토막 말씨나 다를 바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유교리에 사는 장계철씨 소개로 찾아온 것입니다. 장계철씨를 잘 알고 계십니까?』
『예, 잘 알고 말고요.』
『혹시나 장광문씨 웃대 어른들한테 흥성장씨 문중에서 출가승(出家僧)이 된 분이 있단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예! 우리 가문(家門)에서 해남 지방에 가서 천석(千石)군 부자 중이 났다고 하는 말을 선친하고 백부(伯父)님으로부터 종종 들었습니다.』
『?!』

장광문씨의 이 말에 내 가슴이 뛰었다. 아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죄를 진 것도 아니고, 뛸 듯이 기뻐야 할 터인데도 그랬다. 감격이 극에 달하면 사람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내가 그걸 겪기는 처음이었다. 외국에서는 엄청난 돈 액수의 복권에 당첨됐다가 너무 기뻐서 심장마비를 일으킨 일이 있다더니, 지금의 내 심정이 그 짝이었다.

두건거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나는 재우쳐 물었다.
『그 스님의 속명이 장의순(張意恂)이고 불명(佛名)은 초의대사(草衣大師)로 돼 있읍니다. 지금부터 1백20 ~ 30년 전에 돌아가셨고, 출생지는 삼향면으로 돼 있읍니다. 그 웃대 어른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읍니까? 가령 출생지가 어느 마을 어디쯤 된다든가 말입니다.』 그러나 장광문씨는 천석군 부자 중이라는 이야기 외에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해는 졌고 이 동네에는 투숙(投宿)할 데가 없어서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그 집을 나섰다.

11월 20일. 맑은 날씨였다. 나는 다시 삼향면 왕산리로 장광문씨를 찾아갔다. 하루 해를 여기에서 보내더라도 알 것은 알아보고 가야 하겠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나는 초의 스님에 대해서 내가 아는대로 장광문씨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 주면 혹시 그가 듣고 잊어버렸던 기억 속의 실마리라도 풀릴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장광문씨는 그저 「천석군 부자중」말만 되풀이했다. 그러고서는 그가 하는 말이 이랬다. 『제 웃대, 그러니까 약 3백년 전인가 봐요.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샛골이라는 데서 살다가 나주군 동강면 암호리로 이사를 갔더랍니다. 그리고 다시 이리로 이사왔다는 말이 있읍니다. 그게 한 2백년전 일이라고 합디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던 장광문씨가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20여 권의 흥성장씨 족보(族譜)하고 고서(古書)를 들고 나왔다. 그 족보를 뒤져 본 끝에 장광문씨가 말한 내용과 족보의 기록이 일치한 것을 알아냈다. 나주군 다도면에서 동강면으로, 다시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로 옮긴 기록이 족보에 나와 있는 것이다.

또 고서 중에는 초의 스님이 지으신 한시(漢詩)가 보였다. 지으신 해는 계묘년(癸卯年)으로 되어 있다.

歸故鄕詩

초의 스님이 고향을 등진지 40년만에 돌아왔다가 지으신 이 한시(漢詩)는 출가(出家)한 수도승(修道僧)의 몸으로서도 옛 동산을 잊지 못하는 그리움과, 그리고 인생의 무상(無常)을 그린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苦惱)가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나는 이 시를 읽고 나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어느덧 머리에 흰눈(白雪=白髮)을 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다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거니 하고 마음을 가벼운 쪽으로 돌려 내가 이곳을 찾은 본디 일을 계속했다.

장광문씨에게 왕산리에 사는 흥성장씨 일족에 관해서 물었다.
『백년 전하고 80년 전에 호열자(虎列刺=콜레라)가 번졌을 적에 멸족(滅族)하다시피 했지요.』
지금 남은 왕산리의 흥성장씨 일족은 겨우 서너 집 뿐이라고 장광문씨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장광문씨의 종가(宗家) 터는 아직도 왕산리 큰 마을 한복판에 약 1백50평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왕산리 동쪽 산 아래 샛골이라는 곳에 흥성장씨 족보로 보아서, 초의대사 장의순(場意恂)의 출생지는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로 믿을 도리 밖에 없다. 왕산리 동쪽 산 아래 샛골이라는 곳에 흥성장씨의 선영 묘지가 있다는 장광문씨의 말이었다.

이 말이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찾는데 유일한 고증(考證) 자료가 될성 싶다. 샛골을 신기(新基)로 본다면, 초의 스님이 계묘년(癸卯年)에 고향을 찾고 지은 시 속의 「新基草沒家安在 舊墓태荒履跡愁」라는 귀절과 「샛골에 흥성장씨의 선영 묘가 있다.」는 장광문씨의 말이 일치된다.

계묘년은 초의 스님이 56세 때이다. 그리고 그가 6세 때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雲興寺)에 동자승(童子僧)으로 입산했음을 볼 때 초의 스님은 그 동안 나이 열대여섯살 적에 고향에 다녀간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그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섯살의 어린 나이로 입산해야 했을까? 옛날에는 세도가(勢道家)이거나 부잣집 아이라도 운명이 불길하면 절에 들여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초의 스님의 경우처럼 형제가 다섯이나 되고 이사를 세 번이나 했으니 아마도 그럴만한 기구(崎嶇)한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지금도 왕산리 마을에는 논밭이 얼마 안돼서 목포나 나주 등지로 가서 품팔이를 하는 사람과 행상(行商)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장광문씨와 내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자리를 같이한 분이 있다. 왕산리 890번지에 사는 강사복씨(64세)였다. 이날 나는 낮 12시까지 장광문씨, 강사복씨와 아야기를 나눈 끝에 점심을 대접받고 왕산리를 떴다. 무안 양어장 둑을 걸어 오면서 나는 초의 스님의 출생지는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마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짐했다.

흥성장씨 선영 묘가 샛골(新基)에 있고, 그 후손이 장광문씨요, 그의 말대로 그 웃대 어른이 해남 대흥사에 가서 천석군 부자 중이 되었다는 말이 그의 집안에 전해 오는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알 수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심증(心證)일 뿐. 초의 스님을 연구하는 분이 나서서 계속하여 정확한 그의 출생지를 찾아 주었으면 더 다행한 일이겠다.


 - 자료출처 : 錦堂茶話(1978년 發行)

 - 자료작성 : 1999.11.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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