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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文化史

  曉堂과 韓國茶道會, 그리고 韓國茶人會


▣ 序

▣ 本

▣ 韓國의 茶道

▣ 韓國茶道會

▣ 曉堂 제차법

▣ 末


▣ 序

曉堂家 홈페이지를 만들때 "茶硏究"라는 메뉴를 둔 이유는 국내 차의 생산과 소비가 빈약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제차법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여 우리 차문화의 세련된 깊이를 알리는 것도 뜻깊은 일이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반적으로 차문화를 이야기 할 때는 차나무가 생산될 수 있는 지역적인 환경과 차나무의 재배 방법과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만드는 방법과 어떤 도구를 이용하여 잘 우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마실것인가에 대한 기준으로 볼 때 차를 만드는 제차법은 매우 중요한 비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랬동안 제차법에 대한 자료를 모아 보려고 했지만 간혹 텍스트 수준의 글이나 소개 위주의 글로 채워져 있어 좀더 구체적이고 오랫동안 제차인의 경험이 담긴 생생한 내용을 싣고 싶은 혼자만의 만용으로 인해 결국 직접 방문하여 취지를 설명하고 관련 내용을 작성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결론으로 인하여 우선적으로 간간히 지인들을 통하여 알고 있던 한국최초의 茶會를 발족시켰으며, 般若露라는 유명한 차를 만드시는 茶道宗家 曉堂家 채원화선생님을 찾게 되었다.

그 후 주말마다 몇번 뵈면서 그분이 우리의 차문화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었고, 또 효당스님이 가신후 혼자 그 막중한 일을 스스로 감내하면서 겪어신 고통과 보람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글은 후일에 쓰여질 曉堂家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앞서 채선생님이 건네준 일부 자료 중 茶잡지에 기고된 글로 우리 다문화사에 소개되어야 할 중요한 자료라 여겨 원문 그대로 올리게 되었다.


▣ 本

이 세상 모든 일에서 일차적인 因과 보조적인 緣이 합하고 어우러져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이제 韓國茶人會가 발족된지 십여성상이 지나 그 기념행사의 하나로 특대호를 발간하게 되어 그 동기와 실마리를 찾다가 한국차인회가 발족되기 수년전에 다솔사에서 曉堂 崔凡述 스님을 宗匠으로 하여 결성된 「韓國茶道會」와의 연관성을 더듬게 되었다.

여늬 사람은 한국차인회가 한국차도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또 어떤 일이 결실되기에는 맨 처음 뿌린 씨앗이 모태가 되어 크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이기에 어느 눈 밝은이가 그 뿌린 씨앗을 찾다보니 그것이 효당 최범술 스님을 중심으로 발족된 한국차도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차도회 결성을 맨 처음 착안하고 구상하여 효당스님께 권유하고 그 결성을 시도한 필자에게 살아있는 그 증인으로서 그 실마리를 풀어 줄 것을 現 한국차인회 이사장인 황수로씨가 청촉해왔다. 몇번이나 사양하다가 간곡한 청촉에 오랜 세월전에 기억속에 매몰되어있는 옛 일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한 일은 기억에만 매달릴 수 없는 것이라 나는 그 당시의 초대장과 회의록과 기록등을 먼지에 쌍인채 어느 곳인가에 깊이 쳐박혀있던 삶의 보따리들을 뒤적거려 몇날며칠만에 겨우 찾아냈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나는 옛 문서들을 대강 간추리고 내 가슴팍에 깊이 잠재해있던 그 당시의 정황들을 떠 올리며 있었던 그대로 솔직하고도 담백하게 쓸 것을 방침으로 했다.

위 땅에 茶가 들어오고 우리 국민들이 차생활을 한지 오래이건만 어떤 역사도 성쇠는 있는 법이라 일제시대의 암흑기를 거치며 우리 차문화 역시 침체되었다. 그것이 해방을 맞고 현대로 접어들면서 차츰 쇠미해져 강호의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차생활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잊혀진 상태였다.

그런데 曉堂스님은 13세에 다솔사에 입문하여 76세로 서울서 입적하기까지 60여년에 걸쳐 다솔사에 주석하시며 원효성사 교학의 복원과 차선삼매 생활을 해오신 분이다. 그분의 방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없이 사시장철 화로위의 철병에서 솔바람 소리가 일었다. 그야말로 松風槍雨到來處였다.

깊고 그윽한 산사에서 참나무로 만든 백탄숯으로 화로에서 물을 끓이며 철병속에서 끓는 그 물소리를 고요히 들으며 靜坐하여 차선삼매(茶禪三昧)에 몰입하는 경지! 그러나 風情은 오늘날에는 그 어느곳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효당스님이 한국 차도사에서 끼친 공적인 크게 세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 첫째는 「한국의 차도」라는 책의 저술이다.


▣ 韓國의 茶道

이 책이 나오게 되기까지에는 그 실마리가 있다. 1965년도 경에 일본 거류민단 단장인 金正柱氏가 내한하여 한국에서 차도를 아시는 분을 찾다가 누구에게선가 효당스님에 관한 것을 듣고 수소문하여 다솔사로 찾아온 것이다.

그이가 와서 말하기를 일본에는 차도(茶道)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교포들에는 그런 것이 업어 퍽 위축된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茶道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효당스님께서는 기실 茶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먼저 있었고 또 훨씬 훌륭한 茶文化인 茶禮가 집집마다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고 하자 김정주씨는 몹씨 기뻐하며 그렇다면 효당스님께서 우리나라의 茶에 관한 역사를 몇자 적어 주시면 일본으로 가져가서 우리 교포에게 알리며 우리도 훌륭한 차문화가 있음을 긍지로 느끼겠다고 간절히 청을 하여 효당스님께서 20여장에 걸친 우리 차의 내용을 「韓國의 茶生活史」라는 제목하에 책자를 프린터물로 제작하여 100부 정도 가지고 갔다.

그 뒤 다시 200부, 또 다시 400부가 인쇄되어 나왔고, 그것이 각계에 알려져 경남 사천군 군수도 1967년에 200부를 제작하여 인근에 배포했고 또 다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간신문인 독서신문에 여러 달에 걸쳐 「한국의 차·차론」이라는 제명하에 연재가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정리되어 1971년도에 「한국의 차도」라는 차서가 서울 보련각 출판으로 나왔다.

이 책은 효당스님이 60여년을 수도 생활을 하시며 아울러 병행하신 차생활을 쉽고도 편이하게 그러나 달관의 경지가 넘치는 茶道의 개론서다. 이 책이 효시가 되어 그뒤 뜻있는 여러분들의 차에 관한 저서가 나온 걸로 안다. 이것이 차도계에서의 효당스님의 첫번째 공적이다.

둘째는 「한국차도회」의 발족이다.


▣ 韓國茶道會

앞서 얘기한 바처럼 효당스님께서는 늘 차생활을 하시며 스님을 찾아 오고 가는 이도 차를 대접하였다. 또한 여름·겨울 방학기간에는 대학생들 단체가 수련대회를 열며 차도에 관한 이론을 듣고 배우며 또 차를 맛보며 그 실제적인 것을 익혔다.

필자가 효당스님과 숙세의 인연있어 다솔사로 와서 새벽하늘에 별이 총총할 때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효당스님을 항상 곁에서 시봉하다 보니 자연히 차생활이 몸에 베게되고 또 그에 관한 여러가지를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필자는 이렇게 좋은 차생활과 차도정신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면 참으로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면 차도회와 같은 것을 정식으로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보급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착상을 효당스님에게 처음으로 말씀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한국 차도회 결성의 첫 발단이다. 효당스님께서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별로 반응이 없으셨다. 오히려 스님의 말씀인즉 차는 자연스럽게 마시는 것이지 무슨 조직을 하여 억지가 끼이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그때 나는 젊은 열기로 열심히 그 당위성을 피력했다.

즉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는데 차생황을 하게 하여 그 젊음의 열기와 객기를 바로잡아 조화롭고 건강하게 하고 또 그 참된 가치관을 정립케하여 이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게 하고 한편 기성인들은 기성인들 나름대로 차생활을 통해 각박한 삶에서 적절한 심신의 조화를 얻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루는데 한 몫을 하도록 하면 참으로 뜻있고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열심히 그 필요성과 타당성을 말씀드렸던 것이다.

그때가 1972년도 무렵이다. 그렇게 권유하고 말씀드려오기를 쭉 오년 넘게 해왔다. 그러다가 1976년 쯤엔가 비로소 스님께서 뜻을 움직이시어 그해 봄에 차도회를 열기로 계획을 잡고 거의 필자 혼자서 준비를 해나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자가 특별히 개인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님께서는 필자와 인연되기 이전부터 경영해오시던 불교종단에 관계되는 일이 재판중에 있었는데 그무렵 몹씨 힘든 처지에 처해졌고 또 어려운 처지라 다솔사내에는 이렇다 할만한 머리깎은 僧이나 대중이 없었고 또한 이것은 필자 자신이 제의했던 문제로 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하다보니 어떻게 해야한다는 일머리를 자연히 터득하게 된 데서이다.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차를 잘 몰랐고 그나마 스님과 인연닿아 오는 사람은 차를 대접받는데 그것마저도 어른앞에서 마지못해 다소 쓴 차를 마시곤하던 때였다.

그래서 필자는 스님과 의논해가며 차도회에 관한 그 모든 것을 대략 구상했다. 우선 한국차도회 창립 발기인 자격을 선정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차를 한번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적어도 효당스님과 마주앉아 차를 한번이라도 접해본 사람을 선정하기로 하여 백여명 초대하기로 했다.

그 이름은 한국차도회로, 그 본부는 효당스님이 주석해 계시는 경남 사천군 곤명면 원효불교 다솔사로 하되, 조계종 산하의 다솔사가 아닌 효당스님께서 도모하고 있었던 원효불교 다솔사로 하기로 계획했다. 또 그 지부는 진주, 부산, 대구, 광구, 서울, 대전 등지로 우선 설정해 놓고 차츰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이렇게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막상 모임을 벌릴려고 하니 산속에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라 하룻밤을 재워야 하는데 그때 다솔사 살림형편이 여러가지로 궁색하여 이부자리가 충분치 못해 다시 여름으로 미루다가 큰 법난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법난이란 효당스님께서 필자와 인연닿기 수년전부터 경영해오시던 불교적인 분쟁사건으로 인해 받은 고통과 고난을 말한다. 일의 사정이 그렇게 되니 스님께서는 후일로 미루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더 미루면 모처럼의 이 차도회 결성은 무산될 것 같아 혼자서 초대장을 작성하여 급히 우편으로 띄운후 스님께 보고했다.

그동안 효당스님을 찾아오는 뜻있는 이들에게 차도회의 발족을 공공연히 얘기하고 동참을 권유해왔기에 말에 대한 책임도 져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하여 그 이듬해 1977년 1월 15일 오후 1시부터 16일 오후 1시에 걸쳐 처음으로 정식의 「한국차도회」를 결성 발족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동우회 성격의 모임이 몇 있었지만 정식 차도회의 모임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초대한 분은 100여분이었는데 찻날 참가한 분은 40여분 그 이튿날 10여분이 더 참석하여 50여분이었다. 그 분들 가운데는 나중에 결성된 한국 차인회 발족에 중심적 역활을 한 분들이 많다.

본 고에서는 한국차도회 창립의 그 모든 회의 과정과 내용을 적을 수가 없고 단지 그 중요한 내용만을 간추려서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 초대하는 글은

丙辰年을 보내고 丁巳年을 맞아 茶同好人 여러분께 오는 새해의 인사를 드립니다. 금번 이곳 다솔사에서 고래로 전승되어온 茶道의 모색과 茶道의 미래방향을 위한 茶話를 가졌으면 하는 哀情에서 평소 茶를 즐기며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초촐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부디 여러 茶人들께서 참석하시어 이번 茶會를 빛내주기 바라오며 부처님의 大慈悲가 여러분 가정에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丁巳 元旦 曉堂 崔凡述 合掌
茶會日時 : 1977년 1월 15일 오후 1시 ~ 16일 오후 1시(2일간)
茶會場所 : 다솔사 죽로다실
茶果費 : 매인당 3천원

차회가 개최되어 효당스님께서 개회에 앞서 인사말을 하였다.

차를 알고 차를 즐기며 차와 같이 생활하는 우리들이 오늘 모였습니다.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 그 모든 것을 맛보고 힘써 나아가 알뜰한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茶를 하는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입니다.

이는 인간성의 평등과 건실한 인간생활을 중정의 대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광대 무변한 대자비이며, 만인간이 향유해야할 無私心의 大和입니다. 이는 깨끗하고 때없는 청정에 있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감격의 환희와 보은의 생활에서 체득하여지는 성스러운 茶生活인 것입니다.

또한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이 우리 茶人들에게 바라는 사명감을 절실히 느껴서 오늘날 이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茶의 뜻을 알고 우리 겨례의 유구한 역사적 사명을 의식한 우리들은 이 회합을 계기로 우리들의 뜻을 공동으로 성취시키도록 좋은 말씀 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임시의장에는 연세대학교 윤병상 교수가 맡아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다. 또한 전형위원과 규약제정위원을 뽑아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는데 윤병상, 김종희, 김상조, 박종한, 강석희, 문후근, 엄봉섭, 박건재, 채원화(필자) 등이 주로 그 역활을 맡으며 정관 및 규약 그 취지 목적등의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그때 한국 차도회 창립 총회에 참석한 분들로서 현재 차도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로는 위의 사람들 외에도 황수로(현 차인회 이사장), 김규현, 김화수, 여연 등이 있고, 그때 초대되었지만 참석치못한 사람들로서는 한웅빈, 안광석, 김미희, 전보상, 철웅스님, 장은정, 오제봉, 신대용, 정원호 등이 있고, 그외에 예술계, 학계, 법조계, 일반인, 학생 등이 많이 초대되었고 또 참석했다.

그리하여 이틀에 걸쳐 차도회의 결성을 보았다. 그때는 다솔사가 법난중이라 삼천포시 경찰서에서 경찰관들이 한 하오십명이 나와 절을 삼엄히 경비하고 있는 가운데 강행했던 것이다.

자칫하면 무산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참석했던 분들의 열성과 진지함으로 차도회의 발족은 순순히 진행되었다. 그때 제정된 한국차도회 정관의 내용을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총칙

제1조 : 본회의 명칭은 한국차도회라 한다.

제2조 : 본회의 본부는 경남 사천군 곤명면 원효불교 다솔사로 한다.

제3조 : 본회는 한국의 전통 차문화의 연구와 차생활 운동으로 국민정신의 순화와 예절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고 나아가서 세계 차문화 교류를 통하여 국제친선을 도모한다.

제4조 : 본회는 제3조의 목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한다.

1. 차에 관한 문헌의 발간
2. 회보발간
3. 강습회 개최
4. 차문화 전시회 개최
5. 회원의 친목과 국제친선을 위한 차회
6. 차도 지도자 양성
7. 학교 생활관의 차례지도
8. 차산업 육성

그외

제2장 회원의 자격에 관한 건

제3장 본회의 임원 구성건

제4장 지회에 관한 건

제5장 회의에 관한 건

제6장 재정건

제7장 부칙건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정식으로 한국차도회가 창립되어 그 회장으로 선출된 효당스님께서 인사말씀을 하셨다.

차도회의 창립을 보게 됨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아가 찬 이 사람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본인은 차를 통한 공고한 결속으로 차를 알고 차를 즐기며 차와 같이 생활하는 동지들께서 본인의 충정을 잘 이해하시어 함께 힘찬 발전을 기약합시다.

본인은 온 힘을 다하여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후인들에게 넘기는 다리의 역활을 다할 각오입니다. 많은 협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드디어 한국차도회가 결성되어 탄생한 것이다. 斯界에 宗匠이신 효당 최범술 스님을 회장으로 하여 그 본부를 원효불교 다솔사로 하고 그 지회는 서울지구(지화장 : 청사 안광석 선생), 부산지구(지회장 : 청남 오제봉 선생), 대구지구(지회장 : 토우 김종희 선생), 광주지구(지회장 : 의제 허백련 선생), 대전지구(지회장 : 윤병규 선생) 으로 하고 실제적인 일을 주관해 나가는데는 상임이사(아인 박종한 선생), 재무이사 (다솔사측으로서 필자 채연화) 등으로 하고 간사는 본 다솔사에서 효당스님을 모시고 실제로 일을 하는데 도울 수 있는 약간명으로 했다.

이렇게 발족된 한국차도회가 그해 8월에 다시 다솔사에서 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종교적인 분쟁으로 인해 효당스님을 위시한 우리 문중들이 그해 겨울에 다솔사를 떠나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효당스님은 지병으로 인해 1978년도에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대수술을 받았고 퇴원해서는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계시게 되었다.

이무렵 한국 차인회 결성이 거론되며 지난번 한국차도회 결성때 중요 임원이었던 분들 가운데서 몇분들이 다시 큰 역활을 하게 되었다. 이미 그때는 조계종과의 격렬한 종단분쟁으로 인해 우리가 다솔사를 떠나오는 바람에 발족된 한국차도회는 와해될 지경이었고 효당스님은 회복될 가망이 지극히 미약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효당스님은 그 병든 몸을 이끌고서 한국차인회 발족을 위해 고문의 자격으로서 많은 조언과 지도를 한 줄로 안다. 한국차인회 발족을 위한 실무진들이 팔판동의 효당스님 차소에를 들락거렸다. 한국차인회가 창립될 때 그 핵심 구성원 가운데 많은 분이 먼저 발족됐던 한국차도회의 중요임원이었고 또 그 발상을 이어서 전개시켰던 것이다.

이러고보면 한국차도회가 한국차인회의 씨앗이 되었고 모태가 되었음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한국차도회가 유산된채 한국 차문화의 쇄신 기운이 소멸되는 줄 알았는데 이년후에 곧이어 한국차인회 결성을 보게되어 오늘날 10여년에 이르렀으니 그 어찌 기쁘고 뜻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차인회 결성에는 이미 한국차도회 결성때 필자가 익히 잘 아는 분들 외에도 여러분들이 뜻과 힘을 합쳐 만든줄 알고 있다. 애쓴분들 가운데 한사람인 박동선氏는 우리가 종로 팔판동에 거쳐할때 그쪽 측에서 않이 들락거렸는데 그이는 그 무렵을 전후해서 차에 접했던 걸로 들었다.

김미희氏는 다솔사에서 한국차도회 창립준비를 한창 하고 있을 때인 1976년 봄에 한통의 전보를 보내었다. 그 전보에는 「최범술 큰스님 친견차 4월 xx일 방문예정 김미희 올림」이라 했다. 그 전보를 필자가 받아 스님께 전했다.

그 이름이 하도 고와 젊은 여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지나 잘 생긴 중년부인이 다른 한 중년여성을 대동하고 다솔사에 왔었다. 그 이전에도 효당스님도 필자도 그이를 만난적이 없었다.

그 효당스님의 차실인 죽로지실에서 필자가 차 대접을 하였는데 그때 그이의 얘긴즉 자기는 차를 잘 모르는데 얼마전에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잠깐 본 일본잡지에서 우연히 차도에 관한 기사를 접하게 되어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는데 주위에 달리 잘 하는 분이 없어 몹씨 답답하였는데 어디선가 효당스님 말씀을 듣고 차에 관한 것을 여쭤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가 한국차도회 결성 바로 전해 봄이었다. 그이는 그때 오전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차에 관한 이것저것을 효당스님께 물었고 오후 늦게서야 돌아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효당스님께서 서울로 오면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김미희 여사댁에 몇번인가 초대되었고 또 스님께서는 김미희 여사에게 「茗衣」라는 茶號를 지어주셨던 것이다.

茗衣란 차라는 뜻의 茗자와 草衣스님의 衣자를 따서 지어주신 것이다. 그 茗衣라는 차호는 그후 김미희 여사가 「명의 명의」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침 잘 놓는 명의, 의술의 명의로 발음상 착각을 한다하여 그 좋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김미희 여사가 평소 친숙히 지내고 효당스님과 필자도 잘 아는 석관동에 있는 역리에 밝은 朴艸선생과 의논하여 효당스님에게서 받은 茗자는 그냥두고 衣자만 園자로 바꾸어서 「명원」이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이와의 많은 和人들이 「茗園云云」하는 것은 사실 그분이 효당스님에게서 받은 차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했던 그이가 1979년도에 한국차인회가 결성될때 큰 협조를 하고 역활을 했다하니 이것 또한 인연의 자연스런 발전 아니겠는가?

하여튼 한국차도회가 직접적으로 한국차인회와 연관되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차치해놓고라도 한국에서 茶人들의 모임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그 취지와 목적, 그 구성원 등에서 일맥상통하니 그 연계성을 더듬을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다솔사에서 효당스님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차도회의 첫 시도가 한국차인회 결성의 시금석이 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효당 최범술 스님의 두번째 공로다.


▣ 효당 제차법

효당스님의 차도계에서의 세번째 공로는 제차법, 특히 증차를 만드는 법의 전수이다. 차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봄에 새순을 따서 생잎 자체로 가마솥에 넣고 꺼내어 비비다가 다시 솥에 넣어 데쳐내어 물기를 빼서 꺼덜꺼덜해지면 덖고, 띄우고, 다시 蒸하고하여 만드는 재래의 독특한 蒸茶法이다.

이 蒸茶를 만드는 법은 釜炒茶를 만드는 방법보다 훨씬 섬세하고 까다롭고 일이 많으나 부초차와는 달리 장복하여도 위를 상하지 아니하고 색과 향과 맛이 뛰어난 이점이 있다. 한방의 원전인 본초에도 증한 것이 좋다고 했다.

이 증차법은 효당본가인 필자의 차가에서만 「般若露」라고 이름하여 오랫동안 전승 습득해온 방법인데 이것도 미력한 필자를 통해서나마 후인들에게 좋은 차를 만드는 법을 전하게 했으니 이것이 효당스님의 세번째 공로다.


▣ 末

위에서 서술해온 바처럼 초의스님이 한국근세가에 있어서 차도계의 중흥조라면 효당스님은 한국현대사에서의 차도계의 중흥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박학하고 정밀한 지식, 독립운동, 정치, 종교, 학술 불교 등에서의 다양한 삶의 경력, 60여년에 걸쳐 단련된 茶禪三昧力, 그 모든 것이 녹아 아우러져 흘러나오는 교화력, 그것은 충분히 인연닿아 우리 후학들에게 깊고도 큰 영향력을 주었고 또 줄 것임에 틀림없다.

草衣선사는 山泉道人 金命喜 선생에게 보낸 차시에서 인간의 천만가지 일이 그 所從來를 따져보면 봄눈 녹듯 허무한 것이지만 깍아없애지 못하는 한쪼각이 있다했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以無所得의 경지이다. 즉 무슨 댓가나 찬양을 바래서가 아니라 사람노릇 안하고는 못배기는 자리, 그것때문이라 했다.

필자가 여지껏 다소 길게 얘기해 온 것은 누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옛일에 대한 미련때문도 아니고 다만 훗날의 많은 차인들에게 일의 실마리를 타서 진실되게 알려주어 그 이해의 체계를 돕고 나아가 훌륭한 차생활을 하게 함이다.

諸行이 무상하다하지 않는가. 斯界의 거목이셨던 曉堂 崔凡述 스님도 가셨고 그외의 분도 더러 가셨고 우리들 또한 흘러 언젠가는 이세상 속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그 무엇 하나는 끊임없이 이어져 갈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한국차인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할(喝)!


 - 자료출처 : 한국최초 茶會 발족 - 반야로차도문화원장 채원화선생 글

 - 자료작성 : 1999. 3.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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