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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文化史

  [고구려] 문무 고루 갖춘 5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독자적인 왕호·연호·천제의식 갖춰… 뛰어난 문화 창조력

고구려 705년--이 말은 고구려의 위대성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대부분 500년 이상 지속된 역사를 가진 우리가 보기에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지만, 진한시대 이후 3백년 이상된 나라가 송나라(320년) 하나뿐인 중 국 역사가들의 눈에는 고구려 705년 이란 말 자체가 질리는 얘기고 위대한 것이다.

전한 때 개국한 고구려는 강대국인 후한(25∼219) 시기에는 조용히 국력을 키워 나간다. 그러나 한나라가 망한 뒤 중국과 북방 민족들이 서로 다투며 수나라가 통일 할 때까지 385년간 무려 20여 개의 나라들이 나타났 다 사라지는 대 혼란기에 접어 들자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동아시아 의 맹주로 등장한다.

고구려가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한 광개토대왕(391∼413, 22년)과 장수왕(413~ 491, 78년) 때의 100년간은 명실공히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가 된다. 최근 고구려 인들이 직접 기록한 광개토대왕(태왕)비가 해석되고 고고학적 성과가 나오면서 당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주위 국가의 조공을 받으며 군림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지고 있다.

영락태왕, 이것이 광개토대왕의 공식 명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삼국사기는 물론 어떤 중국의 사서에도 나오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이라고만 했고, 중국에 사서에는 아예 담덕 이란 개인의 이름을 쓰고 있다. 태왕칭호의 비밀을 밝혀준 것은 바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다.

태왕이란 왕중왕 이란 뜻으로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기록이다. 중국에서는 진시황 때부터 건국신화인 3황5제 에서 황제를 따내 최고 군주의 명칭으로 쓰기 시작했고, 고구려는 중국과 다른 칭호를 쓰기 위해 태왕이라고 했으며, 7세기 이후 국가를 세운 일본은 천황이란 칭호를 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에서 '태왕'이란 칭호를 복원하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을 되살리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영락이란 광개토대왕이 사용한 연호이다. 연호란 황제가 자리에 오르며 내외에 천명하는 황제의 권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삼국시대 우리가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고구려가 망한 뒤 중국에서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에 자신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고, 사대를 해야 했던 당시의 사가들은 역사를 기술하면서 옛날 고구려나 신라가 썼던 연호를 중국에 대한 불경죄라며 스스로 빼 버린 것이다. 역사책에 연표를 만들 때는 항상 맨 위 쪽에 중국의 연호를 써 놓고 그 밑에 우리나라 왕들을 맞추어 배열하는 한심한 역사 기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학자들도 우리 선조가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최근 광개토대왕비 이외에도 고구려 불상같은 공예품에 고구려의 연호를 쓴 사례들이 나타나 고구려 연호가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역사의 진실 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자들은 고구려가 천제를 지냈고 그것을 동맹 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국사책에서 배워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고구려가 천 제를 지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천자는 천지에 제사지내고, 제후는 사직(땅과 곡식의 신)에 제사지낸다'("예기" 왕제편). 이것이 바로 천자와 제후국 왕의 차이를 제사의식을 통해 정의한 동 아시아 정치질서이다. 천자란 하늘과 땅이 결합하여 탄생하였기 때문에 어버이인 천지에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제후국의 왕은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고 오로지 땅의 신에만 제사 지낼 수 있어 그 권위의 차이는 그야말 로 하늘과 땅의 차이다. 고구려는 당당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낸 태왕국가 였다.

고구려가 영토를 넓히고 태왕국가로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고구려는 국가행정 자체가 군 정일치의 성격이 뚜렷했다. 특히 지방의 행정통치 조직은 곧 군사지휘 체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편성되었고, 지방관은 품계가 높은 무관을 임명 하여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성에 주재하면서 관할 지역에 대한 군사대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항상 20만∼3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10여만 이상의 기마병을 확보함으로써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 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어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났으며, 이러한 기술을 평소 생활에서 익혀 유사시는 전사로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국가적인 차원에서 매년 두 번씩 치르는 수렵대회는 전투력 배양을 생활화하고 고구려 전체를 병영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춤무덤에 보면 유명한 사냥도가 있다. 속도감과 긴장감이 가득찬 사냥터맨 위쪽에는 백마를 타고 달리며 윗몸만 뒤로 돌린 채 두 마리의 사 슴을 향해 화살을 쏘는 힘찬 무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는 호랑이를 향해 막 시위를 당기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호랑이 잡는 고구려 무사, 이 엄청난 파괴력의 기본은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에 있었다.

특히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해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아식은 말안장이나 등자 같은 완벽한 마구와 고도로 훈련된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고구려의 국력과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무기가 발달되고, 고구려 무사는 물론 말에게 도 갑옷을 입혔다. 고구려가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것을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쇠못신이다. 신바닥에 쇠못이 나와있어 눈이나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 것인데 벽화에 나타난 병사가 바로 이 신발을 신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된 겨울철 등산 용 아이젠의 기원을 이야기해 주는 정교한 영상자료이다.

고구려 국방력 강화에서 뺄 수 없는 것이 튼튼한 방어시설, 즉 산성이 다.고구려 문화는 곧 성곽의 문화로 상징될 만큼 북만주로부터 한강 유역 에 이르기까지 200여 개 이상의 성을 쌓았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나라 때 고구려 원정을 한 前 의주자사 정천숙에게 물었더니 고구려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고 대답했다. 이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고구려의 산성은 고구려가 스스로 발명한 치나 옹성 같은 독특한 축성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무정신, 고구려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나 문화적 뒷받침이 없이 상무정신만 가지고 705년간 국가를 유지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그동안 우리는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강조하다보니 고구려가 문화대국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찾으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해방 이후 북한이나 중국에서 대규모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고, 그러한 연구성과를 종합해 보면 고구려는 대단한 문화대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과학적 생활은 발달된 천문학이 대변한다. 고구려 천문 학자들은 당시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성, 항성, 혜성, 유성 등 모든 별을 세밀하게 관측하였는데, '화성(형혹)이 전갈자리 시그마별(심성)에 머물렀다'고 정확하게 관측할 만큼(유리왕 13년) 발달하였다. 고구려에는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있었는데 최근 한국의 천문학 교수에 의해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천문도는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 강물에 빠트려 버렸는데, 당시 떴던 탁본 한장이 조선 초에 발견되어 그것을 대본으로 하여 1395년 유명한 '천상열차분야 지도'를 만들었다.

한편 고구려 벽화에 별자리를 표시한 것이 21기나 되고, 그 가운데 28 수 별자리를 완전하게 그린 무덤(진파리 4호)도 있다. 최근 일본 나라현 아스카의 기토라 고분에서 발견된 천체도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 부근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토대로 그려진 것이 라고 해서 세계가 떠들썩했다. 이것은 바로 고구려의 최첨단 천문 기술이 일본에 전수되었거나, 그 무덤이 고구려에서 건너간 사람의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 나라 마을에서 해가 지면 남녀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으며, 따라서 음악 형태도 다양해지고 악기도 발전하였다. 벽화에는 합창 단과 탈춤, 북춤, 칼춤 등 다양한 춤형식이 나 타나며, 타악기 관악기 등 벽화에 나오는 악기만 해도 24종이나 된다.

고구려인들은 미술의 천재였다. 벽화에 나타난 여인들의 의상과 장신 구, 평상과 밥상 등의 뛰어난 공예술, 각가지 천정과 다양한 고임, 기둥 과 두공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건축술, 그리고 고구려인들의 미술적 수준은 벽화에 그려진 그림 그 자체가 웅변으로 보여준다. 고분벽화는 고구려의 섬세하면서도 힘찬 예술적 창조력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가 문화민족이었다는 것은 90여기가 넘는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마치 당시 찍은 천연색 영화처럼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구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지금까지 문헌을 통해서 바라보던 해석이 최근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들이 나오면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음양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해와 달 그림이 나온 벽화가 24기나 되고, 벽화를 꽉 메운 연꽃 무늬와 만다라, 예불도와 보살도, 사신도와 온갖 신선들, 그리고 불사조 세 발봉황 등 유불선의 세계를 모두 섭렵하는 고구려의 현묘지도를 벽화에서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57년에 축조된 안악3호 무덤에 이미 불교문화적 요소를 읽을 수 있는 데,이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고 공인되고 있는 소수림왕 2 년(372)보다 15년이나 빠른 것이다. 문헌에는 624년(영류왕 7년)에 도교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벽화에는 북두칠성이나 남두육성 등 도교적 요소가 이미 4세기부터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벽화에는 죽은 뒤 신선이 되어 하늘에서 영생을 누리는 내용들이 풍부 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선교사상을 바탕으로 시대에 따라 유교, 불교, 도교 등 수입된 종교사상들을 잘 소화해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향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자료출처 : 주간조선(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서경대교수,경제사)

 - 자료작성 : 1998. 10.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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