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프로필

Contact Us

 茶인연

 茶詩民謠

 茶文化史

 茶人

 茶/茶器/茶具/茶田

 茶寺

 茶文獻

 中國茶文化

 中國茶

 中國茶器

 日本茶文化

 日本茶

 日本茶器

 게시판

 새소식

 갤러리

  茶文化史

  熱河日記(渡江錄 中) - 安市城과 遼東땅의 平陽城


- 序 -

우리의 역사를 옳바르게 알리기 위하여 熱河日記 中 渡江錄에 적혀 있는 안시성과 요동 땅의 평양성에 대한 글을 발췌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귀가에 연암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아아, 옹졸한 후세 사람들이 옳바른 경계를 밝히지는 않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모두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넣어서, 억지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였구나. 어찌 웅장한 조상의 강토를 지키려는 노력은 못 할지언정 우리의 강토를 우리 스스로 줄여서 말한다 말인가?" 라는 통탄의 소리였다.

- 本 -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바로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말하였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였다. 지금도 우리 시골 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한다. 그러니

"수나라나 당나라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러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이러한 말이 전해져 왔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나라 태종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그러자 태종이 성 아래에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였다. 그가 자기 나라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으로 가는 자기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을 송별하는 시에서

우리 나라 양만춘 님이
용 수염 범 눈동자를
한 살에 떨어뜨렸네

라고 하였다. 또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정관음(貞觀吟)에서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 것이 없다더니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을 어이 알았으랴

라고 하였으니, '검은 꽃'은 당태종의 눈이고, '흰 날개'는 화살이다. 이 두 선배들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 나라에서 옛날 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당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한 작은 성(城)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컸다는 것은 사실이다. 김부식은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으니, 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역사책에서 한 번 골라 베껴 내면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을 끌어와서 당태종이 포위하였던 사실까지 입증하였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의 《통감(通鑑)》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그들이 중국의 부끄러움을 감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다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덥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지만, 대체로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오백리나 떨어져 있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의 동북쪽 칠십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삼백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약 이 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오백 리라는 말과 서로 부합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므로

"기자(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기자묘)가 있다." 하면 이를 믿는다.

그래서 만일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고 한다면, 해괴한 말이라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 예(穢). 맥(貊) 등 동이(東彛 : 연암은 夷가 야만족을 가르킨다 하여 彛자를 썼다.) 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오라(烏刺). 영고탑(寧古塔). 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모두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았는데, 어떤 사람은 청천강을 '패수'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압록강을 '패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정해 놓고, 패수의 위치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은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 땅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슨 근거로 그러한 사실을 알았는가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도)나 낙랑(樂浪)은 있지만,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만들고, 원봉(元鳳) 원년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가운데 고구려현(고구려현)이 있고, 낙랑 스물다섯 고을 가운데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가운데 안시현(安市縣)이 있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칠천리, 임둔은 장안에서 육천백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는 (조선 세조 때의 학자) 김윤(金崙)이 밝힌 것처럼

"우리 나라의 지경 안에서는 이 고을들을 찾을 수 없다.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기에 바로 부여(扶餘). 읍루(揖婁). 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다.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은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은 변하여 발해가 되고, 혹은 변하여 여진이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가 남긴 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옹하고 잇달렸으니, 이는 본시 우리의 폭원(幅員) 안에 있었던 것이 더욱 분명하다.

그런데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디인지 일정하기 못한데다, 또 우리 나라의 선비들도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써 표준을 삼아 이러니 저러니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이 무릇 요동 이쪽의 강들을 죄다 '패수'라고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진 뒤에라야 우리 나라의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진 뒤에라야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런즉 봉황성이 틀림없이 평양이냐고 묻는다면, '이곳이 만약 기씨(箕氏). 위씨(衛氏). 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또한 한 개의 평양이다' 라고 대답할 수가 있다.

《당서(唐書)》 《배구전(裵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나라가 이곳에 기자를 봉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고죽국은 지금의 영평부(永平府)에 있었다. 광녕현(廣寧縣)에는 예전에 기자묘가 있어서 우관(우冠)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었는데,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병화(兵火)에 불살라졌다 한다. 어떤 사람들은 광녕현을 평양이라고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 함평(咸平)이 모두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과 광녕 사이가 한 개의 평양일 것이다. 또 《요사(遼史)》에

"발해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했던 평양성이었는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한 개의 평양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 광녕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나라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이천 리 땅을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겨 갔다. 마치 중국의 진(晉)나라와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 가던 사정과 같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테니,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 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뀌던 것처럼 '패수'라는 이름도 따라서 옮겨졌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고 하는 이들은 대동강을 가르켜

"이 물이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도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한다.

그러나 요양을 평양으로 삼는 이들은 헌우낙수(헌芋낙水)를 가르켜 "이 물이 패수다." 라 하고 개평현이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이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 이들은 자기의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 의봉(儀鳳) 2년에 고구려에서 항복해 온 임금 고장(高藏)을 요동주(遼東州) 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케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씨의 강토가 요동에 있는 것을 당나라가 비록 정복하기는 하였지만,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 준 것이다. 그러니 평양은 본래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쓴 이름이거나, 또는 패수와 함께 때에 따라 들쭉날쭉하였을 뿐이다.

한나라의 낙랑군 관청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도 지금의 평양이 이니요. 곧 요동에 있던 평양을 말한다.

그 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요동과 발해 지역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지만, (고려 왕조에서는) 겨우 자비령과 철령의 경계를 삼가 지켜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 돌보지 않았다.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으랴.

고려 안으로 삼국을 합병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다. 후세에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에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역사책만 믿고 흥미롭게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자취를 이야기하되,

"이곳이 패수요, 이곳이 평양이다." 하지만, 이는 벌써 사실과 어긋났음을 이루다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성(城)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 어찌 분간을 할 수 있으랴


 - 자료출처 : 연암 박지원 산문집(리가원.허경진 옮김 ; 한양출판)

 - 자료작성 : 1998. 9. 28일


 '茶文化史'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