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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文化史

  日本 室町時代의 草庵茶에 끼친 梅月堂의 영향


- 序 -

가. 머리말

나. 金鰲山 茸長寺와 梅月堂

다. 茸長寺의 지리역사적 고찰

라. 茶人 梅月堂

마. 室町時代 草菴茶와 梅月堂

바. 조선초기의 三浦倭館中의 염포

사. 朝鮮의 草菴茶

아. 室町時代 茶道

자. 한국 최고의 茶遺蹟地 祇林寺

차. 맺음말


- 序 -

매월당 이 글을 쓰게된 동기는 일본 室町時代 草庵茶의 원류가 조선에서 갔으며, 그 뿌리는 매월당이 경주 金鰲山室에 기거하고 있을 때 염포(울산)에서 일본승 俊長老와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가 쓴 "한국 속의 일본" 이란 책에서 읽은 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책과 자료를 모으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펴낸 "매월당 - 그 문학과 사상"이라는 책에서 崔楨幹씨의 글을 보고 그동안 찾고자 하는 많은 관심사항의 상당부분이 충족되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 내용중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시기는 신라시대다" 라는 글만 본인의 생각과 달라 후일에 정리할 가야시대의 한.중.일 비교 관계사에서 소개하겠지만 우리나라에 차가 신라시대에 들어왔다는 것은 현존하는 문헌에서 보이는 현재까지 最古로 올라갈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 뿐이다.

과거의 역사를 접근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단지 문헌상에 나타난 글만으로 신라시대에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왔다고 우리 스스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잘못된 역사적인 접근법이라고 생각된다.

문헌은 역사적인 사실을 아주 일부분만 표현할 뿐아니라 누가 지은는가 에 따라 상당히 왜곡이 되고, 또 후세에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인위적인 작필이 번번히 이루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초 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적 접근법이 이루어지고 있다.

古語와 古代의 地名을 비교하고, 語原의 찾고, 風習과 등을 비교여 많은 결실을 얻기도 했다. 80년초에 대학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비류백제사"는 고어와 고대지명을 기본으로 하였고, 조선일보에 일본의 만엽집을 소개한 "노래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어원과 방언의 중요성을 절절히 나타내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 本 -

가. 머리말

朝鮮祖의 기존 체제를 뿌리채 부정하고 一生을 방랑과 은둔, 저술로써 보낸 영원한 方外人 梅月堂 金時習 (1435-1493)에 관한 지금까지 연구는 文學的인 것과 傳記的인 것으로 일관되어 왔다.

그런데 梅月堂의 방대한 詩作 중에 茶에 관한 詩가 많이 남아 있어 梅月堂이 조선전기 茶道史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梅月堂이 茶와 어떻게 인연을 맺고 생활을 했는지 또한 그가 조선전기 茶世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 왔는지를 추적해 오던 중에 그의 일생중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 "慶州時節"의 遺蹟地인 金鰲山(일명 남산) 茸長寺와 含月山 祇林寺 일대를 다년간 답사한 끝에 梅月堂이 茶人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밝혀 내게 된 것이다.

그런 중 수년 전에 입수한 일본인 아사까와氏의 저서인 "釜山窯와 對州窯 (1930 彩壺會刊行)"에 의하면 梅月堂이 일본 室町時代 (15세기) 草菴茶에 원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필자의 梅月堂과 일본 草菴茶와의 관계연구에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동안 梅月堂이 15세기 일본의 草菴茶에 끼친 영향은 단편적으로 韓.日 間의 학자들에 의해서 언급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이런 先學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梅月堂이 일본의 草菴茶에 끼친 영향을 구명해 보고자 한다.

나. 金鰲山 茸長寺와 梅月堂

梅月堂의 유적지중에서 필자는 평소 선친(전 경주박물관장 崔南柱)의 敎示에 따라 경주의 金鰲山 茸長寺와 함월산 祗林寺를 주목하게 되었다. 梅月堂의 일생에 있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바로 경주시절이다.

31세에서 37세까지 6년 동안 이곳 茸長寺 草菴에 칩거를 하면서 저 유명한 금오신화를 저술했고 때로는 禪과 華嚴學에 관하여서도 깊은 연구활동을 한 것이다. 그 즈음에 茶나무도 재배를 하고, 茶도 직접 만들어서 金鰲山의 맑은 물로서 茶를 달여서 草菴에서 마시기도 한 것이다. 梅月堂의 그때 모습을 다음 茶詩를 통해 알 수 있다.

『養茶』年年茶樹長新枝 蔭養編籬謹護持 해마다 차나무에 새 가지 자라는데 그늘에 키우노라 울을 엮어 보호하네.

다. 茸長寺의 지리역사적 고찰

茸長寺는 경주에서 남쪽으로 彦陽가는 국도를 따라 10㎞쯤 가다보면 좌측으로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흐르는 金鰲山 茸長寺 입구가 나온다. 본래 金鰲山은 일명 남산으로써 신라시대에는 이 곳 사람들이 정신적인 도장으로써 사찰이 808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라의 역사는 이곳 금오산에서 시작하여(羅井) 金鰲山에서 종말을 고한 곳이다. 충담사가 찬기파랑가와 안민가를 짓고 三花嶺 미륵세존에게 茶를 공양하는 등 이곳 金鰲山은 한국 불교의 매카인 동시에 한국 미술사의 寶庫이기도 하다.

茸長寺는 이곳 서남산 계곡 입구에서 아름다운 개울을 따라 4㎞쯤 올라가면 넓은 골짜기가 나온다. 이 넓은 골짜기에 신라시대 축조를 한 축대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거대한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가다 보면 茸長寺 원형 삼단 대좌불이 나온다. 이 좌불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불상의 높이가 1.4m로써 보물 18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석불의 양식은 불상좌를 둥근 원형으로 쌓아 3층의 형식을 하고 있어 신라시대의 아주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석불은 머리가 없는데 아래의 연합대좌에 이르기까지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이 불상은 茸長寺의 영원한 믿음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 약 3㎞ 지점의 거대한 암벽에는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 역시 8세기 것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띄고 있어 전형적인 신라인의 조각 양식이다. 여기서 다시 5m쯤 위로 올라가면 용장사지의 정상이 나오는데 거대한 암반 위에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써 매우 단아하며 이 석탑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신라 景德王代 忠淡師가 三花嶺 미륵세존에게 茶를 공양한 三花嶺이 보인다.

이상과 같이 현존하는 佛蹟들을 보아 茸長寺는 통일신라 8세기에서 9세기 중에 번창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파편 중에 "華嚴"이란 명문이 쓰여져 있어 茸長寺도 華嚴宗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또한 茸長寺는 고려를 거쳐 조선초까지 법등이 어어져 내려왔다.

한편 東國與地勝覽 (1486 간행)에 의하면 용장사는 금오산에 있는데 승 설잠이 시쓰고 금오신화를 지었다는 등이 기록되어 있어 茸長寺가 梅月堂의 전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곳 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경주의 古老들은 이곳 茸長寺 계곡을 梅月堂이라고 칭하고 있다.

라. 茶人 梅月堂

梅月堂의 入山 동기는 이미 여러 先學들의 논문에서 언급되었기에 본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梅月堂이 禪門에 의탁한 후 金鰲山 草菴에서 금오신화와 그 밖에 많은 詩作을 하면서 용두사 미륵불에게도 손수 만든 茶를 공양한 것이다.

경주 金鰲山(남산) 佛蹟을 한국 학자로써 답사한 崔南柱 (新羅史學家)氏에 의하면 1930년도에 최초로 茸長寺를 답사하였을 때 오래된 茶나무가 竹林속에 野生하는 것을 보았다고 술회하였다.

또한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 茸長寺 계곡이 金鰲山 전체에서 경관이 가장 수려하고 좋은 약수가 나고 있어 梅月堂이 茶生活 하기는 아주 적격이라고 하였다.

이곳 茸長寺 시절에 梅月堂은 서울의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하라는 세조의 요청을 받고 상경하였다가 세조로부터 원각사에 계속해서 남아있으라는 命을 불복하고 다시 茸長寺로 돌아갔다.

梅月堂은 비록 禪門에 귀의하였으나 스스로를 山林處士라고 자처하여 跡佛敢行하는 등 그의 행동에 있어서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도 감행하였다. 율곡이 梅月堂을 가르켜 心儒跡佛이라고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梅月堂은 이곳 茸長寺 생활중에 다음과 같은 茶詩를 남겼다.

曉意

죽견

이상의 다시만 보아도 梅月黨이 茶人으로서 얼마나 단아하고 고매한 경지에 이르렀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마. 室町時代 草菴茶와 梅月堂

1920년대부터 한국에 건너와서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조선도자기 연구에 일생을 헌신한 일본인 학자중에 아사까와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동생 아싸까와 다꼬미와 함께 여명기의 朝鮮陶磁史 정립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며 특히 이들 형제들은 당시 남북한 각지의 古陶窯址를 답사하면서 朝鮮陶磁編年史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의 친구이자 『조선의 예술』이란 불멸의 저술을 남긴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柳宗悅)에게 최초로 조선도자기의 미학을 가르켜 준 사람이다.

이를 계기로 "야나기"를 비롯한 영국인 도예가 "버나드리치" 등 일본의 많은 동호인들이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한편 앞을 다투어 일본도자기의 원류인 조선도자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한편 아사까와氏의 저서 중에는 임진란 직후의 江戶時代 日朝 陶磁交流史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釜山窯와 對州窯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1930년에 <彩壺會刊行>인 "釜山窯와 對州窯"란 귀중한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주로 조선과 일본간의 茶道의 역사와 茶碗의 産地에 관한 연구로써 특히 임란 직후 강화조약 이후(1609년)에 부산의 초량왜관 안에서 釜山窯 開窯하여 70년 동안 德川幕府家에 전용 다완을 보세무역을 한 사실들을 상세히 밝히고 있어 16세기 후반 朝日간 陶磁交流史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66페이지에 보면 梅月堂의이 염포(蔚山)에서 일본의 僧 "俊" 長老와 만나서 茶를 즐겼고 선적인 분위기의 茶詩를 지어 주었으며 그 내용까지도 상세히 기록을 하고 있어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아사까와氏는 이어서 일본의 草菴茶의 원류가 조선에서 건너갔다고 하면서 梅月堂과의 관련설을 밝히고 있다. 梅月堂이 염포(울산)에서 일본 僧 "俊" 長老에게 남긴 茶詩는 다음과 같다.

이 茶詩는 梅月堂이 지은 여러 편의 茶詩中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 시이다. 그리고 이 시의 내용을 잘 분석해 보면 15세기 초반의 조선과 일본의 승려생활의 한 단편을 알 수 있다.

역사와 문화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부터 발전하기 마련이다. 梅月堂이 이국의 승려와 밤을 새워가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분야 (佛敎, 華嚴學, 禪, 文學)에 대한 폭넓은 학문을 주고 받으면서 草菴에 안치한 古佛 앞에 꽂힌 꽃을 보고 무쇠주전자에 茶를 달이고 질화로에 향을 사르며 禪境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인삼밭을 사슴 새끼가 밟고 가더라는 표현은 梅月堂의 禪의 높은 경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경주 金鰲山 茸長寺에서 염포(울산)까지는 하루 길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茸長寺 입구 앞으로 개설된 도로는 신라시대부터 이미 염포와 구포(지금 부산) 지방을 연결하는 대외관계의 중요한 "도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梅月堂이 염포에서 만난 일본의 僧 "俊" 長老가 어떤 인물인지 아직까지 한일 학계에서 밝히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의 여러 상황을 미루어 볼 때 俊長老는 日本의 京都 五山 계통의 외교승으로 추측된다.

이때는 조선 조정과 일본의 室町時代의 足利幕府와의 가장 활발한 교류가 있어서 양국은 통신사들을 자주 파견하였다. (正使 및 副使 모두 승려) 당시 足利幕府의 외교관계를 주도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외교 실무를 맡아 보았던 세력들은 모두가 교오토(京都) 五山의 승려들이었다. (日本의 지식인)

15세기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섭은 조선의 유교적 사대부(학문적 엘리트) 들과 足利幕府의 佛敎的 禪僧들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양국 사이에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相國寺의 유명한 禪僧 슈분(周文) (畵家)은 1432년 11월에 日本國王使 일행으로 三浦中의 한 곳인 乃而浦(慶南熊川)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바. 조선초기의 三浦倭館中의 염포

조선초기 외교는 使信이 서로 왕래할 뿐 사신이 상대국에 상주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일본과 국교를 맺음에 있어서 남쪽 浦口에 倭館을 설치해 주고 있었다. 倭館이란 좁은 뜻으로 倭使가 묵고 있는 倭舍를 가리키나 넓은 뜻으로는 제한된 지역에 일본인을 거주케 하고 이곳에서 倭舍의 접대와 무역을 하던 全 구역을 칭한다.

倭館의 효시는 태종 때 倭人들의 到來所를 4곳에 둔 것이다. (釜山浦, 乃而浦, 염포, 加背梁) 그후 세종 때에 東萊의 釜山浦, 蔚山의 염포, 熊川의 薺浦의 세 곳에 왜관이 설치되어 三浦倭館이라 하였다.

그런데 三浦倭館의 恒居倭人의 수는 증가되고 중종 5년(1510) 三浦倭人이 三浦倭亂을 일으켜 중종 7년에 薺浦 1개소만 倭館 설치를 하기로 했다. 염포가 개항장으로 일본인에게 개방되고 영빈관이 倭館에 설치된 것은 1426년 일이었다.

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염포는 蔚山으로 부터 30리 떨어진 곳에 있고 『恒居倭三十六男女老少年一百三十一寺社』 이었다고 한다. 또 염포에 들어온 일본의 사절은 『左路』로 상경하도록 되어 있고 한양까지의 일정은 15일로 정해져 있었다.

한편 『海東繹史』를 보면 "염포"는 높이 10척의 돌담 (둘레 1천 39척) 으로 둘러싸였고 恒居倭의 가옥 외에 우물이 3곳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梅月堂이 이곳 倭館에서 일본의 禪僧 "俊" 長老와의 만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는 불투명하다.

다만 두 사람이 茶를 나누면서 깊은 草菴茶의 세계를 교류한 것은 梅月堂이 환속하기 전 慶州 金鰲山 茸長寺에서 草菴生活을 하고 있을 때가 확실하다. 그는 환속(1481) 후 곧 바로 한양으로 돌아간 뒤에는 염포에 내려온 기록이 없다. 한편 염포의 倭館은 1510년 三浦倭館을 계기로 폐기되었다.

사. 朝鮮의 草菴茶

茶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이다. 이 당시에도 花郞들이 草菴 같은 亭에서 茶를 즐긴 것을 알 수 있는 記錄은 徐居定 (1420-1488)이 편집한 東人詩話(1474)로써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곳(강릉)에는 古仙의 자취가 있다. 山亭에는 茶를 달이는 아궁이가 있으며 여기서 수십리 떨어진 곳에 寒松亭이 있고, 亭에는 四仙碑가 있다. 지금에 이르러 仙曹와 神侶가 사이를 왕래한다.

위의 시와 같이 신라시대는 화랑들이 明山大川을 다니면서 심신수양 중에 草菴에서 茶를 즐긴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에 있어서 茶와 佛敎와는 끊을 수 있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忠談師와 耆婆郞, 月明師, 慧昭, 眞鑑國師 등의 高僧이 이었기 때문이며 이들도 한결같이 깊은 禪의 경지에서 소박한 茶생황을 즐긴 것이다.

그 중에서 元曉大師가 新羅茶精神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다. 특히 蛇包와의 일화 및 감천전설 등을 비롯하여 원효방 茶論 등이 있다.

고려시대 융성기를 거친 차는 조선조에는 사대부(문인)나 승려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조선의 水墨山水畵中에 소재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草菴이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초가를 덮은 지붕 그 속에서 노인이 한가롭게 독서를 하는가 하면 동자는 茶를 달이는 모습 등은 일본인 학자 아싸까와(천천)가 말하는 조선의 南方草菴이란 이와같은 草亭을 가르킨 것으로 무로마찌(室町)시대에 조선으로 건너 온 일본 승려들이 이런 草亭에서 茶를 나눈 것이 틀림없다.

이밖에 일본인 학자 가네꼬(金子重量)씨도 조선시대 草亭이 日本 草菴의 원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후반(室町時代) 와비茶의 대유행으로 인해 茶室 역시 "市中隱", "市中의 山居"라 불리어졌다. 이와같은 말은 山中에 있는 草菴을 市中으로 옮겼다는 의미이며 속세의 복잡한 생활속에 이 市中의 草菴 속에서 茶를 마시는 것은 禪의 경지처럼 정적에 젖음으로써 마음을 씻었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문인이나 승려들은 산 속 깊숙한 草亭에서 茶를 즐긴 것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16세기 후반 室町時代 草菴茶의 막이 오른 것이다.

아. 무로마찌(室町)時代 茶道

15세기의 日本 茶道는 禪宗 佛敎의 영향으로 와비가 대유행이었다. 와비는 무라다쥬꼬(村田珠光 1423-1520) 로부터 시작되어 다께노죠오(武野紹鷗 1502-1555) 를 거쳐 센리큐(千利休 1522-1591)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종전의 茶道는 書院의 茶라고 하여 단아하고 화려한 宋.元의 채색 그림이나 天目茶碗 등의 훌륭한 미술 공예품을 감상하는 격조있는 귀족품의 茶가 유행이었다.

또한 당시 지배층은 茶道를 經世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때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개방정책을 펴서 많은 서양인들이 교역을 위해 "사까이(堺)" 와 "나까사끼(長崎)" 등에 출입을 하게 되었고 조선 조정과도 三浦를 통해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室町時代의 茶를 마시는 풍습에 관하여 당시 일본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객관적인 관찰기록들이 남아 있어 매우 흥미롭다. 1579 (천정 7년)과 1590 (천정 18년) 두 차례 걸쳐 포르투칼 副王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바리냐니"가 남긴 『일본 이에즈스會士 예법지침』에 의하면

「일본에서 행하여지는 중요한 환영법의 하나는 일본인이 마시도록 주어지는 茶이다. 일본인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을 맞이하는 찻물과 청결에 유념한다.」

포르투칼 이에즈스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1573~ 1591 (天正年間)에 지은 「日歐文化比較」에 의하면

「우리들 사이에서 날마다 마시는 물은 차갑고도 맑은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일본인이 마시는 것은 뜨겁지 않으면 아니되며 댓솔로 저어서 茶를 달여야 한다.」

그 외 "로드리게스"의 「日本敎會史」에 의하면 당시의 末茶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잎은 작고 매우 잘 만들어진 검은 돌절구로 가는 곡식가루처럼 푸른 가루로 간다. 절구는 그 때문에 쓰이는 것으로서 茶절구하고 하는데 이처럼 갈아진 푸른 가루는 품질이 좋은 옻칠한 작은 합이나 용도가 같은 陶器의 작은 단지에 넣는다. 그리고 전용의 작은 댓솔로 이 가루를 떠내어 茶碗에 한두술 넣고 이 경우를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끓인 물을 얼른 그 위에 붓고 이를 위해서 미리 준비된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찻솔로 우아하고도 솜씨있게 그것을 저어서 혼합한다. 그렇게 하면 푸른 찻가루가 녹아서 낟알이 없어지고 같은 빛깔의 한 물이 된다. 이렇게 해서 茶 자체를 마신다.」

한편 일본 茶 풍습에 관하여 우리 측의 문헌상 기록은 1443년 세종 25년 通信使一行中 書狀官으로 日本을 다녀온 申叔舟 (1417-1475)가 쓴 海東諸國記로써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들은 茶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찻집을 두어 茶를 파는데 길가는 사람들은 한 문을 던져서 茶 한주발을 마신다.」

일본의 茶道를 완성시킨 센노 이규우(1522-1591)는 국제 무역항구인 사까이(堺)에 있는 생선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릴때부터 茶공부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다무끼 (北向道련)로부터 書院式의 茶道를 배우다가 그의 소개로 다께노(武野)에게 약 15년간 師事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교오또(京都)에 있는 다이도꾸지 (大德寺)의 쇼우레이 (燒嶺和尙)에게 참선을 공부하였다. 그 후 리쿠우(利休)는 약관 16세의 젊은 나이로 茶會를 열었다고 한다. (松屋久政筆記). 天文 6년 (1537年 2月 13日條) 그 후 利休는 弘治元年(1555년)에 스승인 다께노(武野)가 죽은 후 大德寺의 하루야(春屋) 등에게 참선하는 한편 전국을 방랑하다가 소박한 찻그릇 제작에 전념한다.

1578년(天正 5년) 59세때 오다노부나가 (織田信長)의 茶頭그룹에 참여, 天正 10년 오다(織田)가 本能寺에서 죽자 豊臣秀吉의 茶頭자리로 옮겨가면서 年俸 3천석을 받았다.

豊臣秀吉이 利休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게 된 까닭은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꾸찌(井口海仙 1900-1986)의 "茶道入門"에 의하면

「전국시대 이래로 불안정한 서민의 마음을 가라 앉히고 거칠대로 거칠어지고 우아함을 잃은 무장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武士와 町人의 융화에 茶道를 이용하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光原正義의 「戰國武士와 文藝의 硏究」에 의하면 戰國時代의 大長에게는 가부끼나 連歌와 함께 茶道를 즐기는 것도 보편적인 교양이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利休의 高弟인 난보우(南坊宗啓)는 그의 저서 난뽀우록(南方錄)에 의하면 『利休가 茶에서 기본적으로 주장하려고 한 것은 茶道의 참맛은 草菴에 있다』 라고 하였다.

자. 한국 최고의 茶遺蹟地 祗林寺

경주 함월산 祗林寺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茶遺蹟地이다. 이 절의 창건부터가 茶와 더불어 창건되었고 이 절의 事蹟記에 기록되어 있는 "五種水" 등과 함께 도처에 茶遺蹟들이 散在하고 있다.

특히 祗林寺는 梅月堂이 慶州時節에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다. 지금도 梅月堂의 영정과 영정 채봉문 현판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祗林寺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다만 인도 天竺國의 光有聖人이 이곳에 와 창건해 林井寺하고 했다. 그 후 서기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원효대사가 확장 중수하고 林井寺를 祗林寺라 고쳐 불렀다.

祗林寺의 위치는 慶州에서 동남쪽으로 1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의 명산인 함월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다. 이곳 祗林寺 창건사적기에 나오는 다섯가지 물은 茶를 달이는데 최고의 물이다.

그 첫번째 물은 祗林寺 북암 뒷편 아래 있는 감로수는 찻물로는 세상에서 더없는 최상의 물이다. 물 위에 乳泉처럼 흰 빛이 돌고 있지만 바가지로 떠 보면 그냥 물색인 陰水中의 陰水이다.

두번째 물인 祗林寺 경내있는 "和靜水" 이 물은 오래 마시면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세번째 물이 오백나한전 앞의 삼층석탑 밑의 장군수, 이 물을 계속 마시면 물에 기운이 있어 장수가 된다고 해서 장군수라 불리우고 있다.

네번째 祗林寺 입구 담벼락에 있는 眼明水는 물 맛도 물 맛이지만 이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물이다. 다섯번째가 지금 없어진 祗林寺 개울 건너 東菴의 오탁수(烏啄水) 까마귀가 쪼은 자리에 물이 나 파보니 감로수(甘露水)가 솟았다 해서 까마귀 烏子에 쪼을 탁(啄)해서 烏啄水라 했다.

이상과 같이 祗林寺의 五種水는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茶 의식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祗林寺 창건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茶와 관계되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光有聖人은 다시 제자를 시켜 이번에는 사라수 대왕이 직접 汲水煎茶의 維那(齊를 올리는 의식 절차를 지휘하는 사람)를 시킴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왕이 듣고 기뻐하며 林井寺에 온다. 林井寺에 온 왕은 金관子를 가지고 梅檀井의 물을 길러 茶角을 했는데」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祗林寺가 茶의 居刹로써 유서가 깊다는 것을 梅月堂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梅月堂은 이곳에서 五種水를 사용하여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우리 固有茶를 즐긴 것이다.

차. 맺음말

지금까지 15세기 무로마찌시대 草菴茶와 梅月堂과의 관계를 그가 남긴 茶遺蹟地와 韓日間의 사료를 통해 주마간산식으로 대략 간추려서 요점만 살펴 보았다.

이 과정에서 15세기 韓.日 양국 관계는 보다 넓은 의미 (역사적. 문화적)에서 큰 의의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梅月堂이 무로마찌 말기에 일본 草菴茶와 그 밖의 부분에서도(문학) 많은 영향을 미친 사실에 대해서도 상호 보완적인 연구가 절실하다.

앞으로 韓.日間의 학자들이 梅月堂 연구에 있어서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가 바로 梅月堂이 염포(蔚山)에서 만난 일본의 禪僧 "俊"에 관한 것이다.

끝으로 梅月堂의 茶遺蹟地인 茸長寺와 祗林寺도 귀중하게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 자료출처 : 梅月堂-그 文學과 思想(강원대학교편)

                   . 경주 茸長寺와 기림사의 茶遺蹟址를 中心으로 - 도예연구가 崔楨幹씨 글

 - 자료편집 : 1998.8.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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