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인사말

 프로필

Contact Us

 茶인연

 茶詩民謠

 茶文化史

 茶人

 茶/茶器/茶具/茶田

 茶寺

 茶文獻

 中國茶文化

 中國茶

 中國茶器

 日本茶文化

 日本茶

 日本茶器

 게시판

 새소식

 갤러리

  茶인연

  과연 朝鮮은 나라였던가?(150704)


1392년 유교(儒敎)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선을 세웠다고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교라기 보다는 송나라때 주자(朱子)가 유교를 재해석한 주자학(朱子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자로부터 내려온 유교의 근본이념은 기원전 11세기(1,046년) 에 주나라를 세운 무왕과 무왕이 일찍죽자 어린아들 문왕을 대신하여 무왕의 동생(주왕)이 잘 섭정을 한 후, 문왕에게 순조롭게 왕권을 넘겨준 것과 주나라를 세울 때 자신의 친족과 개국공신들에게 영토(봉지)를 나눠주고 봉지(封地)를 다스리게 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주(周) 왕실을 지키게 한 봉건제도가 만들어 졌다. 즉, 제후국의 왕은 황제로부터 분봉으로 받은 세습이 되는 직할지를 다스리고, 황제는 그에 대한 대가로 제후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과 공납을 받는 통지 이념을 세웠는데. 이런 통치이념을 최고의 이상적인 모델로 이를 따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송나라(960~1279년)는 한나라(漢 기원전206~기원후220) 초기부터 서서히 중앙집권적 통지이념(왕의 친족이나 개국공신에게 봉지를 나누어주고 다스리게 한 것이 아니라 신하를 파견하여 파견기간 동안 다스리게 하는 방식)으로 바꿔어 수나라, 당나라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적 통지이념으로 인해 왕권(王權)이 강화되는 것에 비례하여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전쟁과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들의 잦은 반란 등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문치주의를 강화하고자 절도사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과거제도를 강화하여 군사력을 가지지 않는 문인들에게 행정적 권한을 이양하는 ‘문치주의적 군주제’를 시행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무인(武人)이 수행하던 절도사도 점차 문인(文人)으로 바꿔기 시작하였고, 지휘권도 절도사에서 참모역할을 하는 문인들이 가지게 되었으며 어떤 기록에 의하면 절도사나 장군들의 반란을 원천적으로 줄이고자 특정지역의 근무를 짧게 통지하도록 잦은 근무지를 이동케하여 장군은 휘하에 병사들을 알지 못하고, 병사도 자신들을 지휘하는 장군이 누구인지 모르고 지낼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문치주의 정치는 무인이 천시를 받게 함으로써 더욱 더 군사력을 떨어 뜨렸다.

이런 결과 북방 이민족에 밀려 북송에서 남송으로 수도를 이전하였고, 북방민족의 침략(금나라 등)시에 영토를 빼앗기자 막대한 공물로서 나라를 유지하였고, 비대해진 관료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지출이 많은 등 여러가지 문제를 겪었다. 그나마 기후가 따뜻하고 평야가 많은 남부지역의 정말 엄청난 풍부한 물산(物産) 덕택으로 그나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송니라 말기 즉 남송(南宋) 말기에 태어난 주자(朱熹. 1130~1200) 이런 송나라의 통지이념을 이상적으로 더욱 발전으로 시켜 유교를 재해석한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하였는데 이런 이념을 200년 뒤 조선의 설립이념으로 받아 들었던 것이다.

이런 통치이념이 조선 全시대에 걸쳐 제일 박학(博學)하고 지식창고라 한 다산 정약용 (1762 ~ 836) 연보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면 과연 조선이 나라였는가 싶다.

1784년 여름, 정조임금께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다.

1791년 겨울, “시경강의” 800여 조를 바쳐 정조임금의 칭찬을 들었다.

시경(詩經), 시경이 어떤 책인가? 기원전 1천년 주나라 초기시절 각지방에서 노래로 불러지던 시가(詩歌)가 아니던가? 나라가 존재하기 위하여 최소한 1년치 비상식량도 갖출 여력이 없었고, 정병(正兵) 1만명도 꾸려나갈 여력이 없는 나라에서 2천년 전의 관습, 예절, 생활기준으로 만들어진 성리학만 세상의 최고의 학문으로 여기고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나라가 아니던가? 나라를 영위하고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조차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2천년 전의 통치방식으로 돌아가자고 6백년 동안 국가의 자원을 모두 쏟고 허송세월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철떡같이 믿고 있었던 나라가 아닌가?

그러기에 조선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조차 2천년 전의 시경의 내용을 풀이한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고 실행력있는 대응책을 만들지 못한 저술을 두고, 우리는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막대한 재원을 수반하는 수원성도 이미 나폴레옹(1769~1821) 전후에 대포의 발달로 유럽에서는 방어 목적으로 성(城)을 축조하는 의미가 쇠퇴되었고, 아마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담스미스(1723~1790)는 그 유명한 국부론을 지었지 않는가? 아니 그 300여년 전에 영국 뉴턴의 만유인력, 독일의 라프니치, 이탈리아의 케플러 등 수많은 과학적 지식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우리는 기원전 1천년 전의 사회를 동경하고, 모방하고, 따르고, 갈망한 나라가 어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도처에 편협되고 국수적 생각으로 물리적인 국경을 벗어난 다른 세상의 이념과 사상과 과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마치 사고(思考) 프레임이 조선의 사고력 수준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 마음에 두고 온 생각을 적어본다.


 - 작성일 : 2015.07.04일

 - 작성자 : 수원 늦은 토요일에 씀


 '茶인연'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