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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유당기(與猶堂記)에 대하여


- 배경 -

당호편액(堂號扁額) 다산선생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 대한 내용에 대하여 소개한 글을 많은데 비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堂號)로 여유당이라고 짓게된 배경에 대한 글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동안 나름데로 선생의 책들을 읽으면서, 당호를 쓰게된 느낌을 정리해 두고 싶었다.

우선 1800년 고향 마재로 들어오기 전 몇 년의 연보(年譜)를 보면…

1975년 1월. 정3품 동부승지에 오르고 2월에 병조참의가 되었다. 3월 우부승지가 되었다. '주문모신부사건’에 연좌되어 7월 충청도 금정 찰발(종6품)으로 좌천되었다.

1976년 10월. 규영부(奎瀛府) 교서(校書, 종5품)가 되었다.

1797년 윤6월. 천주학을 신봉한다는 죄로 종3품 황해도 곡산부사로 좌천되었다.

1799년 4월. 정3품 병조참지, 5월에 형조참의가 되었다. 6월에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무고에 대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직하려 했다.

1800년 봄. 처자를 데리고 광주군 마재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왕명으로 다시 올라왔지만 6월 28일에 정조임금이 승하하여 다시 시골로 내렸다.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하였다.

1801년 2월9일. 정원의 논계로 옥(獄)에 갇혔다. 3월 경상도 장계로 유배되었다. 이때 둘째 형 약전(若銓)은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셋째형 약종(若鐘)은 감옥에서 죽었다. 10월에 ‘황서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붙잡혀서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다.

20대인 1789년 문과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박식하고, 명석하여 중용강의, 시경강의 등을 지어 바치고, 왕명으로 기중기를 이용한 수원성제(水原城制) 짓는 등 이론과 실무에 막힘이 없는 선생은 당시 학문을 좋아하던 임금의 눈에 띄어 승진을 거듭하였는 바, 반대파인 노론 등에서 시기과 질시가 있었다.

그 후 정조임금이 승하(180.6.28일)하기 전 몇 년간 선생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집안에서 천주학을 믿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좌천을 거듭하였고 그때 마다 임금은 선생을 좌천을 보냈으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곁에 두기 위해 서울로 올리기를 반복할 만큼 선생을 총애 하였다. 그리고 1800년 마재에 내려갔다가 다시 임금이 불러 올라와 중책을 맡을 쯤에 임금이 승하한 것이다.

벼슬살이 할 때도 선생은 바른소리 잘하고, 호불호가 분명하였으며, 한마디로 말하면 서울깍정이 같이 성격이라고 할까? 이런 성격으로 인해 선생 주위에 그를 시기하고 질시하는 적(敵)들 많았다고 할수 있다. 한 예로 둘째 형 약전과 같이 친구들 모임을 할 때면 항상 빈틈이 없고 바른말을 하는 통에 나중에 형은 슬그머니 동생을 모임에 끼워주지 않았고, 또 어느때 형은 동생과 얘기하면서 우리에게 변고(變故)가 생길 경우에 마음 아파하고, 같이해주는 친구들이 우리 둘 중에 누구에게 있겠는가 할 정도로 형은 동생의 성격을 은근히 나무라기도 하였다.

특히 이런 성격은 18년간의 유배가 풀려서 고향 마재에 올라오고 나서, 강진 다산초당에서 친척 자녀들에게 과거공부를 가르켜 주고 마련한 농지에 대해, 집으로 귀향하기 전에 집안사람인 윤모씨에게 맡기면서 약속한 소출 농작물의 일정한 수입을 마재 집으로 안보내 오자 독촉 편지를 보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매사에 빈틈이 없고, 깐깐한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배경하에서 선생은 총애받던 정조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나서,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점차 시시각각으로 자신에게 겨누어지는 비난의 칼을 의식하면서 서재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 여유당기(與猶堂記) -

그만두고 싶은데 하지 못하고 부득이 자기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 이 일은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다. 자기는 하고 싶은데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자기로 하여금 하지 않는 것, 이 일은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항상 하면서 그러나 그만두고 하고 싶지 않는 것은 때때로 그만둘 수 있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항상 하면서 그러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때때로 그만 둘때가 있다. 이와 같이 살피면 천하(天下)는 모두 무사하다.

내 병통은 내 스스로 안다. 용감하면서 꾀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면서 가릴줄 모른다. 마음 맞으면 바로 행하고, 의심이나 두려움이 없다. 일을 그만둘 수 있는데 진실로 마음이 맞으면 그만하지 못한다. 하고자 함이 없어도 진실로 마음에 걸림이 있고 툭 터지지 못하면 반드시 그만둘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바야흐로 어려 몽매할때 일찍이 멋대로 방외로 치달릴면서도 의심이 없었고, 장년이 되어 과거시험 공부에 빠져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삼십대에 이미 지난일을 깊이 뉘우치면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선(善) 좋아함에 싫은 적이 없었는데 비방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아! 이 역시 운명인가 성격인가. 내가 또한 어떻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나는 노자가 말하길 '與여~ 겨울에 내(川)을 건너듯 하고, 유(猶)여~ 두려워하길 사방에 이웃이 둘러있듯이 하라.'라는 것을 보았다. 아~ 이 두 말이 내 병의 약(藥)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겨울에 내를 건너는 자(者)는 추위에 뼈마디를 에이고, 심히 부득이가 아니면 건너지 않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자(者)는 때를 살펴 몸에 닥치지 않으면 비록 심히 부득이해도 하지 않는다.

남과 더불어 논(論), 경(經), 예(禮)의 다름과 같음에 대하여 편지를 쓰고자 하는가? 이에 생각하니 비록 하지 않아도 해(害) 될 것이 없다. 비록 하지 않아도 해 될 것이 없는 것은 부득이 한 것이 아니다. 부득이 한것이 아니니 또 그만둔다. 남의 상소를 논하고 싶어 조정 대신의 시비를 말하려는가? 이에 생각하니 이는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은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또한 그만둔다.

널리 진기한 것을 모으고, 옛 물건을 감상하고 싶은가? 또 그만둔다. 관직에 있고 싶으면서 공공의 재화를 농간하고, 부러운 것을 훔치고 싶은가? 또한 그만둔다. 무릇 마음에 작용이 있어 뜻이 싹트는 것은 심히 부득히 하지 않으면 또 그마둔다. 비록 부득이 하더라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으면 또한 그만둔다. 이와같이 살핀다면 천하(天下)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내가 이런 뜻을 얻은 것이 또 6~7년이다. 집에 그것을 얼굴로 삼고자 하나 생각해 보고 또 그만둔다. 이에 초천(苕川)으로 돌아와 비로써 처마에 첩(貼)을 쓰고 그것을 이름으로 병기하고, 아이들에게 내보인다.


 - 참고자료
    . 뜬세상의 아름다움-원문(태학사)
    . 다산 정약용 시선(평민사)
    .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 목민심서

 - 자료작성 : 2015.04.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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