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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인연

  천년 뒤에 나타난 조선의 소동파 연암 박지원 -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150318)


- 序 -

통상 묘지명은 본인과 조상의 족보와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은 어떤 가문이며, 어떤 벼슬을 하였는지와 그가 생전에 남긴 공적을 길게 나열하는 것이 중국이나 한국의 대부분의 묘지명의 일관된 형식이다. 그래서 C. W. 세람이 지은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을 보면 프랑스 언어학자 상뿔리옹이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하여 해석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유적지에 남아있는 옛날 비문을 서로 대조하여 글자의 뜻을 발견한다고 하였다. 특히 비문의 마지막에 '고이 잠드소서' 등의 문자는 수천년이 지나도 원형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렇듯 산문중에서도 제일 고루하게 형식이 변하지 않는 것이 비문이다. 그런 가운데서 기억에 남는 비문을 들라면 한유선생이 지은 "전중소감마군묘지(殿中少監馬君墓誌)"의 글과 심노숭선생이 지은 아내 묘지 주위에 나무 심은 뜻을 쓴 "신산종수기(新山種樹記)"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연암선생이 지은 이 맏누이의 묘지명은 3백자도 체 안되는 글이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우리나라 산문 가운데도 가장 빼어난 글(白眉)인 동시에 마치 송나라의 소동파가 천년 뒤에 다시 조선에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만큼 연암의 글은 정조시대에 세상을 놀라게한 글이며, 동시대 인(人)들이 다투어 읽고, 그의 문체를 따라하는 선비들이 하도 많아서 왕이 옛 법도를 흐린다고 할 정도의 大 문장가가 바로 연암선생이다.

- 本 -

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유인 휘는 아무요, 반남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중미가 기록하며 말하길... 유인은 16세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가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두었다. 신묘년(1771, 영조47) 9월 초하루날 세상을 떴다. 산 해가 43년이며, 지아비 선산이 아곡이라, 장차 경좌의 자리에 장사지내려 한다.

백규는 이윽고 그 어진 아내를 잃고, 가난하여 생계를 삼을 방도가 없었다. 어린 아이와 겨우 10살인 계집종을 데리고 크고 작은 솥 몇 개, 상자, 바구니 몇 개를 배에 싣고 강에 띄워 협곡으로 가면서 상여도 함께 싣고 출발하였다. 중미(연암)가 새벽에 두포(지금 한강과 중량천이 만나는 옥수동과 행당동 뱃머리) 배 가운데로 와서 배웅을 하면서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어떤 독자는 이 대목에서 왜 그렇게 아내를 삯바느질로 생계를 몰면서 남편은 왜 그렇게 무능하게 살았는지 원망을 하겠지만, 그 당시가 그랬다. 연암이 어떤 6월 장마비가 내리는 가운데서 몇 날을 굶고 지낸 이야기와 형암 이덕무가 폐결핵이 걸린 모친의 기침소리가 모친이 죽은 뒤에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 온다는 그런 세상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농사로 겨우 풀질하는 나라이고 전쟁이나 흉년을 대비한 국가 식량을 1년치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거의 20년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의 농토는 40~50% 유실이 되었고, 국가 경제는 파탄 직전의 상황이 조선 말까지 이어진 것과 유교, 성리학을 국가의 대간으로 삶은 조선에서 선비가 하는 일, 아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지 않으면 그냥 집에서 글이나 읽을 수 밖에 없는 시대 인것을 지금의 기준으로 비유할 수가 없다.

다음 문장이 연암이 아니고서는 결코 지을 수 없는 글이다. 이런 비통스럽고 통곡을 하는 심정인 상황에서... 아니 도저히 서울 언저리에서는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어 선산이 있는 묘지 주변 황무지에 조그마한 밭뙤기라도 일구어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어린애들과 변변찮은 가구 몇 개 달랑 싣고, 그기에다 누님의 상여까지 싣고 떠나는 상황에서 연암은 전혀 엉뚱한 과거 누님과 행복한 한 때로 상황을 급반전시켜 글을 전개시키고 있다.

아! 슬프구나~. 누님 시집가는 날 새벽에 화장하는 일이 마치 어제 같습니다. 내가 막 여덟살이었지요. 누님이 시집간다기에 괜실히 심통이 나서 시집가지 말라는 말은 못하고 마치 말이 흙바닥을 뒹굴듯이 심통을 부리기도 하고, 또 서방님 말투로 떠듬거리며 진중하게 흉내도 내었지요. 이때 누님이 부끄러워 하는 가운데 얼레빗을 떨구었는데 내 이마에 떨어졌지요. 안그래도 심통이 나 있는 참인데 잘 되었다는 듯이 성질을 막 부리며 먹을 화장분에 문지르고, 침을 거울에 냅다 뱉어 질펀하게 발랐지요. 이때 누님은 옥압과 금봉 등의 노리개를 꺼내와서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우는 것을 달래 주었지요. 그것이 지금으로 부터 28년 전이네요 누님~.

말을 세워 강위에서 멀리 보니, 붉은 깃발이 펄럭거리는 것이 보이고, 돛대의 그림자가 물위에 일렁거립니다. 저 멀리 산기슭 나무가 있는 곳에서 배가 돌아가더니 숨어 버리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강위에 보이는 먼 산은 짓푸른게 마치 누님이 시집갈때 모습같이 쪽진 머리칼이 갈라져 있는 듯하고, 강물 빛은 거울 같이 맑은 가운데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같았습니다. 흐느껴 울면서 누님이 빗을 떨어뜨릴 때를 생각했습니다.

유독 어릴때 일이 또렷이 생각납니다. 또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고, 세월이 길어 중간에 이별의 근심에 항상 괴로웠하였고, 빈곤에 근심하였습니다. 총총하게 지나기가 꿈속 같습니다. 형제기간으로 살아온 날이 또 이다지도 심히 재촉한가요?

가는자 정녕 훗날을 기약하지만

오히려 보내는 이는 눈물로 옷을 적십니다.

조각배를 타고 이렇게 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런지

보내는 이는 망연히 언덕 위로 올라가 가는 모습 봅니다.


 - 작성일 : 2015.03.18일

 - 작성자 : 불천(不遷), 수원 陋室에서 씀

 - 참고서 : 연암집1,2,3권(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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