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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당선생(阮堂先生) 유배지를 방문하고 (020301)


유배지 3일간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2.23일) 낮시간이 남아 같이 간 동료들과 대정읍에 있는 완당선생의 유배지를 찾아갔다. 사실 동료들은 모르지만 차(茶)를 마시는 나는 오랜전 부터 제주에 가면 꼭 한번 들리고 싶은 곳이었다.

같이 출장간 분들도 다들 선생의 그 유명한 추사체는 익히 알고 있고, 어렴풋이 제주에 유배를 왔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 동의를 구하는데는 별 어려움 없었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다른 것들은 다 제처두고서라도 바로 9년 동안의 유배기간에 추사체(秋史體)와 세한도(歲寒圖)를 완성한 장소만으로도 한번은 가 볼 만하다고 은근히 부추김도 넣었다.

이곳은 조선조 헌종 때 완당(阮堂 金正喜. 1786 - 1856) 선생이 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헌종 6년부터 14년까지 9년간 적거생활을 하였다. 이는 대대로 지체높은 세도 가문으로 선생이 51세 되던 헌종 2년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헌종 6년(55세, 1840년) 동지사로 임명되었으나 모함으로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었다하여 40일 동안 참혹한 고문을 겪은 뒤 지우인 우의정 조인영의 소언으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하졸에 끌려 먼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1840년 9월 27일, 처음 배를 탈 때에는 일기가 좋았으니 오후부터는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폭풍우가 몰아쳤다. 모두들 당황해 어쩔줄 몰랐으나 선생은 오히려 배 앞머리에 나서서 시를 읊으며 도사공에게 방향을 제시했다고 한다. 선생의 항해 지휘로 폭풍우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제주땅 화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정 유배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정의 반쯤은 모두 돌길이라서 사람과 말이 비록 발붙이기가 어려웠지만 이틀이 지나자 조금 평평해지네. 또 무성한 그늘 속을 지나는데 겨우 한가닥 햇빛이 통할 뿐이나 모두 아름다운 나무들로 겨울에도 푸르러 시들지 않고 있으며 간혹 단풍든 수풀이 있어도 새빨간 잎이라서 육지의 단풍잎과는 다르네. 매우 좋아 구경할 만하였으나 엄한 길이 바쁘니 무슨 흥취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흥취를 돋을 수 있겠는가?" 라 적고 있다.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해서 지냈는데 현재 선생의 적거지가 바로 이 집이다. 이 집은 1948년 4.3항쟁 때 불타 버리고 빈터만 남은 것을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에 자리잡은 선생의 적거지에는 기념관과 함께 초가(草家)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는데, 이 초가는 굳이 추사가 살았던 집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더라도 제주 초가의 모범으로 둘러 볼 만 하다.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와 사랑채인 밖거리, 그리고 모퉁이 한쪽에 있는 목거리(별채), 제주식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이 있다.

기념관에는 복사품이기는 하지만 선생의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쉬운 점은 사진도 찍을 수 없고 그렇다고 전시된 물건에 대한 책자도 없어 일일이 옮겨 적을 수 없어 아쉬웠다. 선생이 쓰신 글씨 중에는 하루종일 아무도 찾아 오는 이 없이 홀로지내는 심중을 담담히 적은 것이 있어 머나먼 천리에 유배온 선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또 "분향소재(焚香小齋)"라는 글씨는 "작은 서재에서 향을 피워 독서를 한다"라는 뜻 인데 눈길이 멈추고 마음에 속 들어온다. 언젠가 단아한 집을 짓는다면 당호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歲寒圖

선생은 밖거리에서 배움을 청해오는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한편, 목거리의 작은 방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국보 180호인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점의 서화를 남겼다. 세한도는 역관으로 중국에 왕래하면서 각종 서책을 보내오는 이상적(李尙迪, 1804 - 1865)의 변함없는 후의에 감사하여 그린 작품으로 절조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쓰신 글을 조금 적어 보면

"지난해 晩學 大雲의 二書를 보내오고, 올해에 또 藕전문편을 보내왔는데 이는 세상에 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우기 천만리나 먼 곳에서 구하여 몇 년이 걸려 얻었으니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도도한 세상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쫓는데 비해 마음과 노력을 씀이 이와같아 권세와 이익을 찾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취한 늙은이를 따르기를 세상의 건리 따르는 것처럼 했구나.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이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멀어진다'고 하였고, 그래도 도도한 세상 속의 한 사람인데도 권세와 이익의 밖에 초연히 벗어나 있으니,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은 것이다. ..."로 적고 있다.

세한도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헌종 10년 (1844년) 10월 이상적은 동지사 이정경(李晸卿)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에 갈 때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가지고 가서 오위경(吳偉卿)선생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여 한림학사 문인들이 모여 있는데서 선생이 그리신 세한도를 보여주자 모두 감탄하여 그 자리에서 16명이 발문(拔文)을 쓴 것이다. 이상적은 세한도와 발문을 고이 간직하여 귀국한 후, 그것을 다시 제주의 선생에게 보냈는데 그것을 받아 본 감회는 어떠했을 까?

또한 선생은 오래전부터 다산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동갑인 초의선사를 만나 친교가 두터웠고 선사가 해마다 보내오는 차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반야심경'을 써서 보낸 적도 있고, 차인이라면 누구나 알 고 있는 그 유명한 '명선(茗禪)'을 써서 보냈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선생의 귀양지에 직접 몇번 찾아가 같이 지내며 차나무도 심고 참선도 하였다고 한다. 귀양살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세한도를 비롯한 불후의 서화들을 남겨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솔직히 나는 옛 서체 뿐만아니라 추사체에 대하여 더더욱 문외한이라 말로만 듣던 그런 감정을 가지지 못 했었다. 그런데 선생이 쓰신 '반야심경'을 보고 마치 활자체 처럼 한 자 한 자 너무나 또렷한 글자여서 붓으로 쓴 것 같지 않았는데서 오히려 이런 단단한 기초를 생각했고, '명선(茗禪)'이란 글자에서는 혼이 서려 있는 듯하여 어렴풋하게 추사체를 간접적으로 느낀 적이 있는데, 지금도 선생의 추사체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자격은 전혀 없는 문외한 사람임을 밝힌다.

선생의 학예관을 흠모하던 헌종의 배려로 안동김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848년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리게 된다. 그러나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순원대비(純元大妃)가 철종을 보위에 오르게 하고 수렴청정으로 대권을 잡자, 영의정 권돈인은 철종의 등극이 항렬에 맞지 않는다고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권돈인이 狼川으로 유배하고 선생을 배후 발설자로 지목하여 다시 1851년 선생의 나이 66세이 北靑으로 유배를 보내어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예산에 있는 고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봉은사 등지에서 머물며 서도와 불교에 몰두하다가 철종 7년 1856년에 71세를 일기로 과천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인물이 세상에서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다. 어디 이 한사람 뿐이겠는가?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 작성일 : 2002.03.01일

 - 제주출장 후 잠시 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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