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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남산순례 (010725)


나에게 경주는 언제 찾아도 다정하고 돌아가 쉬고 싶은 곳으로 마음이 번잡할 때나 어디에 조용히 머물려있고 싶을 때 또는 노후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 바로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이다.

자주 가는 곳이만 매번 경주의 참모습을 보기보단 그냥 쉬고 오는 편이어서 이번만은 南山이라도 좀 답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경주지역만 표시된 지도까지 구입하고는 대충 가 보고 싶은 곳을 찾아 보았다.

우선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매월당 김시습이 후반에 머물렸든 용장사지(茸長寺地)로 3년전 휴가 때에도 이곳을 가 보려고 했지만 자동차가 없던 관계로 못 갔던 곳이다. 그리고 시간이 있다면 西南山이 있는 언양으로 가는 35번 국도 쪽으로 지도에 표시된 군데군데를 가보고 싶었다.

이른 새벽에 대구에 도착한 관계로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잔 뒤 부모님을 모시고 경주시내에 도착을 하니 점심시간이 좀 지난 시간이었다. 아는 곳도 없고하여 시내가까운 식당에서 콩국수로 요기를 하고 주인아줌마에게 물어서 용장사쪽의 35번 국도를 물어보니 친절히 답해준다.

문천교를 지나니 바로 오른쪽으로 오릉(五陵)이 보이고 조금 더 가니 나정(蘿井)이라는 팻말이 있다. 글자로 보아 신라 우물이 있던 곳이라라. 입구를 따라 골짜기로 쪽으로 들어가니 근자에 지은 듯한 재실(齋室) 들이 아담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 경주에 온 느낌이 이제야 들어온다.

다음으로 간 곳은 포석정(鮑石亭)으로 창건 연대는 모르나 기울어 가는 신라말 경애왕(景哀王)이 이곳에서 견원에게 무참히 살해된 애사(哀史)가 전해 오는 곳이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변화하는 정세에 눈을 돌리기 보다는 종친들간에 왕자리 뺏기에 여념이 없었고 자신과 왕실, 종친만을 위해 안락에 탐닉한 것이 결국 신라 패망의 원인이었다.

더우기 심국유사 권12 신라본기 경애왕편에 보면 견원의 군대가 잔치를 벌이고 있던 포석정에 불시에 쳐들어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쫓겨 우왕좌왕하는 처참한 광경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어떻게 수도의 심장부에 까지 후백제군에 쳐들어 왔는데도 무방비할 수 있었는지! 분명 성곽을 지키고 있던 병사나 백성들이 적군이 들어오는데 동조를 하거나 최소한 묵인을 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고려말과 같이 왕이 피폐해가는 나라에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헐벗은 백성들의 원성에서도 자신과 자신을 옹립한 무리들과 함께 날 새는 줄 모르고 술잔과 궁녀들의 교태로 지샌 末路를 말해준다. 삼국통일 전후에 보인 용맹과 단결이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 경쟁 대상국이 없어진 관계로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져버리고 내부적인 권력다툼, 나태, 방종으로 흐른 결과인 것이다. 이는 중국史가 그렇고, 여말이나 19c말이나 나라가 바뀌는 시절에 흔히 보이는 상황과 같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1천년의 왕조를 유지 한 나라가 그렇게 많치 않다. 중국史를 보더라도 300년을 넘긴 왕조도 찾기 힘든데, 우리나라의 왕조는 고려 5백년, 조선 6백년 등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보통 5백년 이상은 유지를 했다는 것은 어쨌든 대단한 것이고 자랑해야 될 일이라고 본다. 어차피 세상사의 모든 일이 그렇듯 흥망성쇄가 있기 마련인데 그토록 왕조를 오래 유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들이 그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拜里 삼존석불 포석정을 약식으로 대충 둘러본 뒤 바로 아래에 있는 拜里 삼존석불로 갔다. 배리입구에서 약 300미터를 올라가면 보물 제 63호로 지정된 삼존석불이 나타난다. 팻말이 적힌 바에 따르면 원래 이 곳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32년 10월 경에 현 위치에 옮겼다고 한다. 80년 초까지 누각이 없이 그냥 세워져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가보니 삼존석불이 누각 안에 모셔져 있었다. 건물 상태로 보아 아마 80년대에 세워진 것 같았다.

중앙에는 석존이 있는데 얼굴 뒤 광배는 불상과 같은 돌로 이어져 있다. 좌측 보살상은 이중의 연화대(蓮化臺) 위에 역시 입상으로 조각된 것이다. 섬세하기로는 삼존석불 중에 제일이다. 아쉽게도 무릎부분이 잘린 것을 그대로 세워져 있다. 뒤에 광배에도 다섯개의 소불이 새겨져 있다. 우측 보살상은 조각이 좀 단조로운 모습이다. 허리를 쫘 펴고 당당하고 우람하게 서 있다.

이곳에서 같이간 가족들은 삼배를 올린 후, 바로 옆에 있는 삼불사로 발길을 옮겼다. 삼불사는 대웅전, 산신각과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창고 같은 건물 3채로 되어 있는데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데 많이 퇴락되었다. 아마 절 살림살이가 그렇게 넉넉한 것 같지 않았다. 고즈넉한 길을 따라 내려오니 바로 옆에 망월사가 있다. 망월사도 자그마한 절로 퇴락한 상태로 경우 명맥을 이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옛날의 아름답던 영화만을 기억의 자취로 남겨진 현실을 보는 듯하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들이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상(相)에 따라 운명 지워지는 것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모처럼 울창한 송림(松林) 있는 삼릉계곡으로 좌측에는 삼릉이 있고, 우측에는 경애왕능이 자리하고 있다. 삼릉(三陵)은 평범한 원형의 봉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달라와 신덕왕, 경명왕의 삼왕릉이라고 한다.

三陵溪橋 골짜기가 깊고 송림이 우거져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도로 주위에 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 주위분들이 휴식을 취하러 여기에 오는 것 같았다. 지도에 삼릉계곡 위에 관음보살입상이 표시되어 있어 불상을 보려고 한참으로 올라가도 보이질 않는다. 골짜기를 내려오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더 올라가다가 한 낮이라 덥기도 하고, 아래에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어 아쉽지만 내려왔다. 늦가을이나 소소한 겨울에도 그 맛이 살아 있을 것 같다. 내려와 골짜기 우측에 있는 경애왕릉을 둘러보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비운이라고 해야할지 인과의 말로라고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다.

다음으로 비파교(琵琶橋)를 지나 용장교(茸長橋) 못미쳐 마을계곡으로 들어갔다. 그토록 가보고 싶던 용장사지로 들어가는 곳이다. 도로길이 짧고 비포장 길이 험하고 경사가 심해서 걸어서 못 올라가고 다시 나오면서 지도에 표시된 남산 순환도로를 보니 정상에서 용장사지가 오히려 가깝다. 경주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포석정길 바로 아래라고 표시된 이 순환도로를 찾으려고 해도 초행길이라 찾을 수 없었다. 집안 식구들과 모이기로 한 저녁시간이 다가와 좀 더 찾지 못했다.

다음날 오전부터 너무 무더워 밖으로 다닐 수 없을 것 같다. 호텔내에서 여기저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좀 늦은 무렵에야 첨성대, 월성대공원, 계림, 반월성, 성내에 석빙고를 둘러 보았다. 반월성을 둘러보니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어 반월성이 온 보람이 들었다. 반월성은 성이 생긴 생김새가 반월(半月) 같아 반월성이라고 지워진 것 같다.

약 1시간 가량을 둘러보니 성 주변을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성 뒤로는 가파른 절벽아래로 남천이 흐르고, 성 입구 주위 쪽은 토성을 쌓아 만든 흔적들이 보인다. 성 입구 좌측으로 올라가니 석빙고가 있는데 입구 위에 가로로 놓인 긴 돌에 새긴 글씨로 보아 그 당대에 쓰여진 것으로 입구에 서니 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반월성은 면적과 위치로 보아 성 내에 왕궁이 있다기 보다 왕궁 가까이에 위치하면서 내외적인 난(亂)이 발생하면 급하게 피신하는 역할을 반월성이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성 입구에 있는 계림지역과 월성대공원 사이를 인위적으로 물길을 돌려 만든 도랑이 있고, 월성대공원의 넓은 지역에 분포한 주춧돌로 보아 이 자리가 바로 왕궁이 들어 섰던 곳 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경주남산은 너무 더운 날씨로 인해 세세한 곳을 찾지 못했지만 어느 휴가 때보다 많은 시간을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보냈다. 다음 번에는 남산순환로를 꼭 찾아 볼 계획이고, 용장사지와 동남산을 돌아볼 계획을 가져본다.


 - 작성일 : 2001.07.25일

 - 경주에서 휴가를 보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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